모든 글자를 담을 수 있을까?
천자문(千字文)은 언뜻 보기에 팬그램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문장처럼 보입니다. 이는 천자문이 네 글자로 이루어진 250구의 한시(漢詩)로 구성되며, 단 하나의 글자도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천자문은 팬그램이 아닙니다. 팬그램이란 특정 언어의 모든 문자를 포함하는 문장을 의미하는데, 천자문에는 중국어의 모든 한자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자는 그 특성상 팬그램을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한자의 총 개수가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청나라 시기에 편찬된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약 4만7,035자가 실려 있으며, 1986년에 출간된 한어대자전(漢語大字典) 초판에는 5만4,678자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한자의 개수가 수만 자에 이르는 만큼, 하나의 문장이나 텍스트 안에 모든 한자를 포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반면, 알파벳이나 한글은 상대적으로 글자의 개수가 적어 팬그램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영어의 경우 26개의 알파벳만 포함하면 되며, 한글 팬그램도 기본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작성됩니다.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학자 주흥사(周興嗣, 470~521)가 초대 황제인 무제의 명을 받아 제작한 작품입니다. 무제는 주흥사에게 네 글자씩 맞춘 250구의 시를 짓되, 단 한 글자도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작업은 단 하룻밤 만에 완성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감안하면, 주흥사가 이 작업을 수행하는 데 엄청난 정신적 부담을 느꼈을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주흥사는 어명을 수행하여 천자문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룻밤 사이에 하얗게 변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자문에는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만약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것이 아니라 모두 빠졌다면, '광수문(光首文)'이나 '독두문(禿頭文)'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지도 모릅니다.
천자문은 단순히 반복되지 않는 한자를 모은 시집이 아니라, 유교적 가르침과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는 교육적 문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천자문은 한자를 익히는 기초 교재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으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교육용 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천자문은 한자의 기초를 배우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집니다.
결론적으로 천자문은 팬그램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팬그램이 아닙니다. 팬그램은 특정 언어의 모든 글자를 포함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지만, 천자문은 한자의 방대한 양을 고려할 때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를 단 한 글자도 반복하지 않고 구성된 점에서 천자문은 매우 독창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으며, 한자 교육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