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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가격표: 서울병과 제주병의 진실

우리가 돈으로 산 며칠간의 판타지

by 김형범

오래전, 낭만의 도시 파리를 동경하던 일본인들이 막상 파리에 도착해서는 충격에 빠져 병을 앓는 현상이 있었다. 이른바 '파리 증후군(Paris Syndrome)'이다. 영화 속 우아한 파리지앵과 고풍스러운 거리 대신, 그들을 맞이한 것은 불친절한 웨이터와 지저분한 거리, 소매치기의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환상과 현실의 괴리가 뇌의 처리 용량을 초과해버린 탓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화살표가 한국을 향하고 있다. 최근 중국인 관광객들을 비롯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서울병'이나 '제주병'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다. 한국 여행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한국에서의 기억이 너무나 사무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무기력증과 우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한강에서 라면을 먹고, 세련된 카페에서 인증샷을 남기던 그 며칠이 그들에게는 마치 천국을 맛본 것과 같았으리라.


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 '병'의 원인은 서울이나 제주라는 도시의 마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이 앓고 있는 것은 '자본으로 구매한 판타지(Fantasy) 중독'이다.


여행자가 느끼는 도시는 거주자가 살아가는 도시와 물리적 공간만 공유할 뿐,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에게 아침 8시의 지하철 2호선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지만, 오후 2시의 홍대 거리를 걷는 여행객에게 지하철은 그저 이색적인 풍경일 뿐이다. 거주자에게 편의점은 끼니를 때우는 곳이지만, 여행자에게는 K-푸드를 체험하는 놀이터가 된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그 황홀한 기분은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행자는 철저하게 '소비자'의 권력을 누린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친절한 미소, 깨끗한 침구, 편리한 서비스는 모두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했기에 제공되는 것들이다. 반면 일상은 '생산자' 혹은 '생활인'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한다. 돈을 쓰는 주체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주체로 돌아오는 순간, 도시는 더 이상 나에게 친절하지 않다.


'서울병'에 걸린 이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사실 서울이라는 구체적 지명보다,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나는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월세를 걱정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수많은 군중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환대를 받는 귀한 손님이 된다. 내가 걷는 모든 곳이 무대가 되고, 내가 먹는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그 병의 이름은 '서울병'이 아니라 '소비자 권력 상실 증후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미디어는 이 환상에 기름을 붓는다. 드라마와 SNS는 도시의 가장 빛나는 순간만을 편집해서 송출한다. 땀 냄새 나는 만원 버스와 치솟는 장바구니 물가는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다. 관광객들은 그 편집된 하이라이트 필름 속으로 걸어 들어와, 잠시나마 주인공 배역을 연기하다 떠나는 셈이다.


여행이 주는 위로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팍팍한 삶을 버티게 하는 건 때때로 그런 달콤한 환상이니까. 다만, 우리가 여행지에서 느낀 그 벅찬 감동이 그 도시의 '진짜 얼굴'이라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우리가 지불한 비용만큼 예쁘게 포장된 상품일 뿐이다.


중국인들이 앓는다는 서울병, 일본인들이 앓았던 파리병. 그 기저에 깔린 것은 결국 현실의 무게다.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과 대접받는 기분, 그것은 우리가 떠나온 현실이 그만큼 고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행이 끝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밀려오는 공허함은, 어쩌면 화려했던 파티가 끝나고 청구서를 받아 든 사람의 마음과 가장 닮아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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