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국 8번의 이사가 남긴, 나의 집에 관한 단상
낯선 환경 속에서 영어 울렁증을 앓다
집에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마트는 집에서 차로 5분이면 도착하는 월마트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월마트는 몸집이 나의 세배쯤 되는 사람들이 주요 고객들이다. 오클라호마는 학교 주변을 제외하고는, 내가 직접 걸을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데, 대부분 차를 타고 다니고 이 쇼핑몰에서 저 쇼핑몰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실제로 걸어 다닐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먹는 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오클라호마 사람들은 미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비만율이 높은 주여서 산만한 몸집의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월마트뿐 아니라 대부분의 쇼핑몰 바로 앞에는 장애인 주차장이 있고, 그들이 타고 쇼핑을 할 수 있는 전동 휠체어가 늘 준비되어 있다. TV에서나 보던 비만이 너무 심해서 걷지 못할 정도로 몸집이 커진 사람들이 그것을 주로 이용한다. 이런 생경한 모습은 그래도 눈에 금방 익숙해진다.
내가 살던 동네는 대부분 픽업트럭 같이 큰 차를 몰고 다니는, 소위 '레드넥(Redneck)'이라고 불리는 교양 수준이 낮은 보수적인 남부 백인들이 사는 동네였다. 월마트 앞에 있는 주유소에는 이런 픽업트럭을 모는 덩치 큰 레드넥 아저씨들이 늘 진을 치고 있었다. 당연히 동양인 차별이 심했고 차별 축에도 못 끼는 일들이 종종 생기곤 했다. 쇼핑하려고 샵에 들어가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쳐다보는 건 일상이고, 말을 하면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봐도 아예 대꾸를 안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 않아도 영어로 된 일상은 처음이라 어려운 것 투성인데, 남부 특유의 사투리는 막 미국에 건너온 나에게는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들의 억양도 어색한데 자주 사용하는 구어체 용어들을 들으면 나의 머릿속은 늘 하얘진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급기야는 영어 울렁증까지 생기고 말았다. 말을 하려고 하면 눈을 크게 굴리면서 얼버무리거나, 못 알아듣겠다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금이라면 "어디서 내 말을 못 알아들어, 네가 이상한 거야!"라고 당당히 내 요구를 끝까지 관철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숨겨두었던 모든 어색함과 창피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뛰쳐나와 그냥 내 등딱지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 굴러 떨어진 돌멩이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면서 모난 부분이 조금씩 깎아지면서 나는 동그란 돌이 되어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껏 살아왔던 인생과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좌절감을 꾸준히 맛보고 나면 자신감은 곤두박질을 치고 만다. 내가 투사가 되어서 싸우던가 아니면 좌절하면서 수그러들던가 둘 중의 하나일 텐데, 투사가 되어서 세상의 향해 덤벼드는 건 드라마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평범한 나는 그저 작아지고 작아져서 더 작아질 수 없을 때까지 작아지다가 조금씩 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삶의 즐거움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런 낯선 일상 속에서 나를 살렸던 건 바로 호기심 강한 '탐험 정신'이다. 남편은 세상에서 지루한 거라면 절대 못 참는 사람이라 이런 오클라호마의 지루함을 못 견뎌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루한 일상을 없앨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탐험가가 되었다.
오클라호마 시티 주변에 주로 맛집과 카페들이 모여 있었고 그 주변을 중심으로 새로운 곳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했다. 건물 전체가 화사한 화이트톤으로 칠해진 아주 맛있는 컵케이크 가게도 있고, 빨강머리 앤에 나올법한 정원이 예쁘게 가꾸어진 아담한 주택을 개조한 카페도 있다. 생식에 가까운 익히지 않은 로우 푸드를 파는 레스토랑도 있고, 유기농 식품과 공정무역 상품, 재활용 제품들을 파는 작고 예쁜 식료품점도 있다. 텍사스 바비큐가 맛있다는 식당이나 피자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 동네만 가면 우린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것들을 탐닉했다.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우린 남의 집 정원 구경에 나서기도 했다. 대저택이 많은 크라운 하이츠(Crown Heights)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곳에는 정원사들이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정원이 많았다.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저마다 자랑하듯 정원 장식에 공을 들였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하는 램프 장식은 볼만했는데, 일 년 내내 이 시즌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전기세를 들여 해마다 반짝반짝 빛나게 꾸며 놓는다. 우리는 마치 도시 투어를 하듯 차를 타고 천천히 돌면서 가을에는 핼러윈 장식을, 겨울에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구경했다. 이따금 야생 소인 버펄로 구경에도 나섰다. 오클라호마의 자연환경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곳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어서 생소한 구경거리가 많았다. 집에서 1시간 정도 차로 달리면 버펄로 소떼를 구경할 수도 있고 버펄로 고기로 만든 햄버거를 파는 유명 레스토랑도 갈 수 있었다.
물론 오클라호마가 대도시에 사는 것처럼 늘 다채롭고 재미있는 곳은 아니다. 여행을 가더라도 대도시 하나를 만나기 위해 기본 3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 정도, 하늘과 땅의 끊임없는 이어짐의 지옥을 맛보고 나야 비로소 달콤한 대도시의 공기를 맡을 수 있다. 제일 가까운 도시는 아래쪽으로는 3시간 거리에 있는 텍사스의 달라스와 6시간 거리의 휴스턴. 위쪽으로는 세인트 루이스와 시카고다. 위쪽으로 가야 더 재미있으니 시카고 가는 걸 더 좋아했는데, 여기는 조금 더 멀어서 7시간 정도의 옥수수밭을 지나 세인트 루이스에서 잠시 쉬고 다시 5시간 더 가야만 시카고 미시간 호수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나중에는 이런 긴 자동차 여행에도 익숙해져서 여행 후 집에 돌아오면서 오클라호마 주에 들어왔다는 표지판만 봐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집이구나, 싶은 그런 느낌. 거기서부터 3시간은 더 달려야 우리 집에 도착하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