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느 정도 해탈했지만 하루에 한 번씩 화가 나던 때가 있었다. 기분 좋게 출근해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고, 업무를 받고 일을 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부드럽게 시간의 흐름대로 착착 흘러간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일을 끝내고 상사의 컨펌과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내 몸 안에 흐르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하는 피드백 내용 때문이었는데 주로 객관적인 피드백이 아닌 감정적인 피드백이 내 안의 화를 일으켰다.
“이거 좀 이상한데 다시 해주세요” “(레퍼런스 이미지 하나 보냄) 이 느낌대로 가시죠” “다른 느낌으로 해주세요” “(읽씹)”
표현은 다 다르지만 이 피드백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다음 방향성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레퍼런스 이미지를 보낸다면 어떤 느낌인지 유추할 수 있도록 3~4장의 이미지를 함께 보낸다던지, 레퍼런스 이미지가 표현하는 느낌 중 어떤 느낌이 좋은 건지, 지금 보낸 작업 파일은 A 컨셉의 이미지인데 다른 느낌인 B 컨셉으로 제작해보자라고 방향을 제시하던지. 정확한 피드백을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걸지도 모른다. 피드백을 듣고 있으면 원하는 방향을 자신도 모른 채 일을 지시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만든 작업물을 보고 난 뒤 그제야 자신이 원하던 이미지가 떠오른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만든 이것만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어.) 다른 느낌으로 해주세요”
단어 사이의 숨겨진 공백을 찾아 의미를 해석하는 건 너무나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이다. 진짜 최악은 읽씹. 팀원들 사이에서는 읽씹=마음에 들지 않음으로 암묵적인 룰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몇 마디 해주는 거, 몇 글자 써주시는 게 그렇게 힘드셨나요...
이런 상황을 겪은 초반에는 반복적인 디자인 수정 때문에 화가 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반복적인 수정보다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은 다음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상황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문제집에 있는 문제를 풀 때 공식을 이용하거나 지문에 나와있는 내용을 참고해서 정답을 찾는다. 정답을 맞히지 못했을 경우 해설지에 나와있는 해설을 보면서 내가 잘못된 공식을 적용했는지 지문의 내용을 잘 못 이해했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을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간다. 디자인을 할 때도 비슷하다. 내가 작업한 결과물이 문제의 정답이 아니라면, 옳은 정답으로 갈 수 있는 해설지나 네가 사용한 공식은 맞는 공식이 아니야 이 공식을 사용해볼래? 정도의 가이드가 필요하다. 이 역할은 최종적인 컨펌을 하는 사람이 해 주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팀장 급의 중간 관리자들이 빈 틈을 메꿔줘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환경을 갖추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브런치에서 ‘디자인 피드백’ 키워드로 글을 몇 개를 읽어봤는데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도 많이 올라와있었다. 모두 좋은 방법이었지만 똑같은 얘기를 굳이 또 할 필요는 없으니, 그들과는 조금 다른 나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적어도 내가 싫어했던 유형의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한다. 처음은 누구나 주니어로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주니어가 시니어 연차가 되고, 중간 관리자가 되었을 때 예전에 들었던 피드백과 다른 피드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거 별론데? 식의 주관적인 피드백, 문제 해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디자인 피드백과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다. 자신도 모르게 밑에 있는 주니어를 괴롭히고 있는 상사가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말로 설명할 수 있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고 괜히 있어 보이는 단어를 사용해야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쉽고 간단한 단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짜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에게 제작의도를 설명해달라고 하면 우물쭈물하며 설명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끝내 마지막에는 ‘제가 디자인을 잘하지 못해서 제작의도를 설명해달라고 하신 것 같네요. 그냥 제가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다. 결과물의 퀄리티와 상관없이 제작자의 태도로 인해 일을 두 번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도 피곤하고 회사 입장에서도 같은 일을 두 번 하는 꼴이 되니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논리적인 글쓰기는 일어나는 일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왜 이 색상을 사용했는지, 배치는 왜 이렇게 했는지 등 작고 사소한 이유더라도 생각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조금씩 익숙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습관을 디자인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영역에도 적용해보자. 나는 오늘 왜 화가 났고, 어떨 때 행복했으며, 주말에 간 식당은 왜 좋았는지 등 사소한 이유를 찾고 글을 쓰는 것은 좋은 디자이너가 되는 것에도 도움이 되고 나를 어떻게 브랜딩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해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
보면서 무릎을 탁 쳤던 디자이너에게 도움이 되는 영상 1. 피드백 어떻게 해야 잘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