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인 패션 새 시즌이 공개되었다. 한국인 우승자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가 있던 시리즈물로 넥스트 인 패션을 기억하고 있다. 시즌 1을 끝까지 보진 않았지만 새로운 컨텐츠는 지나칠 수 없기에 틈틈이 보고 있는 중이다. 짧은 시간 안에 옷을 뚝딱 만드는 참가자들을 보며 한 번 놀라고, 그 옷에 추상적인 미션을 구체적인 형태로 담아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며 재미있게 보고 있다.
넥스트 인 패션이 있기 전 비슷한 구성의 패션 경연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가 있었다. 10개가 넘는 시즌으로 오랜 시간 동안 제작된 프로그램이다. 미국 예능 컨텐츠였던 프로젝트 런웨이는 인기에 힘입어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기존 프로그램의 구성을 그대로 따와 한국 디자이너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다.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가 방송하던 시절은 지금처럼 OTT플랫폼이 없어서 컨텐츠를 보고 싶으면 TV에서 방영되는 본방송 시간과 재방송 시간이 중요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방송 시간은 주말 늦은 저녁이었다. 방송 시간까지 잠을 안 자는 게 내 나이에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고 같은 시간 다른 채널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방송하고 있어 본방송을 보는 것이 녹록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총 4 시즌으로 매 회 챙겨보면서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어렴풋하게 그렸다.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를 봤던 옛날이나 넥스트 인 패션을 보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미션 결과물로 나온 옷 중 몇 개는 ‘이걸 어떻게 입고 다니지?’ 생각이 드는 것. 색감이나 패턴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옷의 형태가 거대하거나 몸에 너무 딱 붙어서 저 옷을 입는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겠다 싶은 옷이 보인다. 그 방송 회차에서는 옷을 만든 디자이너, 심사평을 하는 심사위원들이 옷을 설명할 때 ‘오트꾸뛰르’ 단어를 많이 말했다. 오트꾸뛰르는 상류층을 위한 맞춤옷으로 기성복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다. 산업혁명이 있기 전까지 의복은 대량생산 하지 않고 봉제사가 옷을 입는 사람의 신체를 측정하여 하나하나 맞춤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고 그래서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 대량 생산이 쉬워지면서 기성복에 대한 퀄리티가 높아졌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현대의 오트쿠튀르는 ‘하이패션’ 개념과 함께 실용성보다는 예술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입을 수 없는 옷이지만 그 해 브랜드의 철학과 지향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개념이 더 크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오트꾸뛰르는 존재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사고방식이 ‘실용성’에 맞춰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최근까지 했다. 하지만 새로움을 위해서 때로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편하고 익숙한 것만 세상에 나온다면 새로운 혁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애플의 신제품이라고 소개된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비아냥거렸다. 귀에 콩나물을 꽂고 다니는 거냐, 저걸 누가 사냐, 이게 진짜 애플 제품이 맞냐 반응이 가지각색이었다. 다양한 관심 속에 제품은 사진과 똑같은 형태로 ‘에어팟’ 이름을 목에 걸고 출시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콩나물을 귀에 꽂고 다녔고 경쟁 업체들도 유사 제품을 출시했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매번 줄이 꼬인 이어폰을 푸느라 낑낑거리면서도 굳이 무선 이어폰이 필요해? 입장이 확고했다. 잠깐의 불편함은 있지만 그게 그렇게 치명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을 바꾸면서 접한 무선 이어폰의 세계는 신세계였다. 선이 없어지면서 이어폰을 사용할 때 생기는 행동 제약이 사라져 음악을 들으면서 할 수 있는 활동 반경이 늘어났다. 처음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곧 하나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 오트꾸뛰르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리브랜딩을 한 이니스프리를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바뀐 이니스프리를 처음 보았을 때 기존에 내세웠던 ‘제주도’, ‘자연’의 이미지가 옅어져서 처음 보는 사람이 이니스프리를 떠올리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게 어떻게 이니스프리냐, 예전이 더 나았다, 예전과 다르지만 훨씬 트렌디해져서 좋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새로운 BI가 인터넷 커뮤니티, 유명 IT 메신저를 연상시킨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댓글을 보고 다시 이니스프리를 봤을 때 어떤 느낌을 말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이해되었다.
지금까지의 이니스프리는 ‘제주도’라는 구체적인 지역을 브랜드 이미지로 삼았다.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이미지들이 어느 정도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무형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계속해서 통일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변화한 BI를 보며 사람들이 이질감을 크게 느끼는 게 아닐까. 새로운 이니스프리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섬을 브랜드 이미지로 차용했다. ‘THE NEW ISLE’이라는 섬을 만들고 그곳에 가기 위해 포털(문)을 그래픽 모티프로 만들었다. 관련 기사와 영상을 찾아보고 나니, 이니스프리 스토리가 조금씩 이해됐다. 지금은 예전의 이니스프리가 우리에게 더 익숙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기존 화장품 업계의 브랜딩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브랜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새로운 BI와 패키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화장품은 브랜딩을 할 때 특유의 무드가 서로 다른 브랜드에서 쉽게 겹친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 되며 특출 나게 좋은 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제품의 성분과 효능으로 브랜딩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니스프리의 새로운 BI는 오트쿠뛰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적으로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눈에 익어 익숙해진다. 다만 NEW ISLE을 키워드로 확장해 나갈 세계관과 스토리가 충분한 맥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 구조에서 미묘하게 이상한 점은 생각보다 쉽게 느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