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고딕지구의 한 레스토랑에서 메뉴 델 디아를 먹고 길을 나선다. 목적지까지는 오르막길을 포함해 약 2.6km 거리에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구글 지도'가 친절히 알려준다. 평지를 지나 몬주익 언덕을 오르자 카탈루냐의 따끈한 날씨 덕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의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을 때 도보의 수고로움은 부드럽고 얕은 바람과 함께 곧 증발해버렸다.
길을 함께 오르던 여행자 가족 / 언덕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풍경에 잠시 취해 땀을 식히고 곧 목적지를 향해 약간은 나른한 오후의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목적지는 호안 미로 미술관(Fundació Joan Miró)이다.
호안 미로는 스페인, 특히 바르셀로나 출신의 카탈루냐의 예술가이다. 카탈루냐 지방은 북쪽으로 피레네 산맥이 동쪽으로 지중해의 해안선과 맞닿아 있어 아름다운 코발트 빛 해변을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더불어 스페인의 17개의 자치지방 중 가장 부유하며 카탈루냐어라는 지방 언어까지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1893년 4월, 금세공사인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고 그가 태어났다. 그는 청소년기에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며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상업학교와 산업예술학교에 동시에 진학하여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정해진 수순에 따라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했으나 이내 장티푸스와 신경쇠약으로 요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완강하던 호안 미로의 아버지는 결국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허락한다.
하지만 첫 개인전에서 대실패의 경험을 맛보게 되는데, 작품이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첫 전시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을 볼 수도 그렇다고 자신만의 완성된 화풍도 가지지 못한 작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대 호안 미로 미술관 아트샵에는 그 첫 전시의 작품들이 엽서와 포스터, 아트상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필자도 뒤질세라 마음에 드는 그림 몇 장을 골라 담았다.
Montroig, la iglesia y el pueblo (1918) / Portrait of a Young Girl (1915) - 첫 개인전의 작품들
호안미로 미술관의 입구와 구입한 엽서들
요즘 표현으로 '폭망한 첫 번째 전시' 후에도 그는 계속 화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던 호안 미로는 고집만큼이나 스스로의 성찰도 게을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당시 밀려드는 새로운 화풍과 표현들을 공부하고 훈련하여 부족한 부분을 다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오토마티즘 등 많은 것들이 그와 그의 작품을 통과해 지나갔다. 시대를 지나며 다양한 사조와 시도들이 녹아든 그의 작품 중에는 피카소와 헤밍웨이가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팔렸으니 당연히 호안 미로 미술관에는 없었지만 각각 미국과 프랑스의 갤러리에서 당당히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좌)Self-Portrait (1919), Musée Picasso / (우)The Farm (1921),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언덕에 위치한 호안 미로 미술관을 돌다 보면 바르셀로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창이 있고, 조형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옥외공간도 만날 수 있다. 필자처럼 넉넉하지 않은 시간 속에 많은 것을 마음과 머리에 넣어야 하는 여행자들에게는 더없이 감사한 배려로 느껴졌다.
미술관 외부로 뚫린 창과 옥외공간을 통해 바르셀로나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옥외 공간에 마련된 조형작품을 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호안 미로는 1925년 이후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Person Throwing a Stone at a Bird (1926), MoMA, NY
그리고 1940년대에 들어서는 그의 창작 시기 중 가장 중요하면서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그림들이 그려진다. 이른바 <성좌> 시리즈라 불리는 23점의 작품은 별, 달, 원, 눈, 새, 동물, 인간의 형상 등을 미로만의 표현방식으로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마주하면서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제목과 작품을 번갈아 보며 무언가 떠올리려고 머리를 짜내는데 결국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그림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발랄한 코끼리와 음표들과 유영하듯 자유로운 동물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Woman dreaming of escape (1945 ) / Figures and Dog in Front of the Sun (1949)
미술관을 다녀온 지 한 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TV 광고에서 다시 호안 미로의 작품과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역시 그의 그림은 나를 웃게 했다. "호안 미로가? 라면에?! "하며 말이다.
오뚜기의 호안 미로 스페셜 에디션
그의 그림은 시간이 갈수록 시간을 잊어버리는 그림인 것 같다. 시간의 무게가 실려 묵직하고 정적으로 변하는 대신 자유로운 동심이 가득한 그만의 예술세계가 활짝 열리며 결국 암울한 시대의 분위기를 초월한 천진한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보는 이의 마음을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필자 역시 동심을 가득 품고 둘러본 아트샵의 기념품을 살랑살랑 흔들며 마지막으로 호안 미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미술관을 나와 다시 언덕에 서서잠시 고민을 한다. 버스를 탈지 걸어갈지 결정할 순간이다. 해는 저 멀리 뉘엿뉘엿 넘어가고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