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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Sep 30. 2021

뜻밖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대한민국에서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아침 8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뒷목이 뻐근하고 머리가 무거웠지만 오늘의 일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약해 둔 기차를 타고 3시간 남짓 달려 마드리드 아토차 역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스페인 광장을 지나 마드리드 왕궁과 마요르 광장, 솔 광장을 차례로 지나 드디어 목적지 앞에 도착했다.  "후-" 하며 괜스레 큰 숨을 내쉬고는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마드리드 시내와 마요르 광장



마드리드의 많고 많은 미술관 중에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미술관의 모든 작품을 다 관람하고 감상의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점

둘째,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점

셋째, 사진 촬영이 자유롭다는 점


이렇게 세 가지의 큰 이유에서였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출처:www.museothyssen.org)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은 이름에서 이미 알 수 있듯 개인 컬렉션에서 시작하여 1993년 스페인 국립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독일의 귀족 가문 출신인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은 미스 스페인  출신이었던 5번째 부인의 협력 아래 선조 대대로 수집해 왔던 소중한 작품들을 스페인 땅에 자리 잡게 했다. 물론 이 소중한 컬렉션을 유치하기 위해 스페인 정부에서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미술관은 전체적으로 산뜻한 느낌이 드는데 살구빛 벽의 색깔에서 주는 느낌도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12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작품들을 폭넓게 시대순으로 관람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조금 지루해 질만 하면, 한 번쯤 본듯한 작가와 작품들이 등장하며 다시 한번 관람에 집중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16시간 비행 후 한 작품 한 작품을 면밀히 감상하기에는 여전히 피곤한 감이 있었다. 

전시장 초반에는 주로 종교화들이 주를 이루었다.




교과서에서 본 듯한 작품들은 희미해져가는 집중력을 다시 솟아나게 한다



지친 두 발을 이끌고 마지막 층에 다 달았을 때 빨간 티셔츠를 입고 미술관을 뛰어다니는 어린 소년과 스쳤다. 국가를 막론하고 어린이들은 다 같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다음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여기에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빈센트의 작품이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그 앞에서 한 참을 서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처음엔 물감이 듬뿍 묻은 속도감이 느껴지는 그의 붓질을 따라갔고 시선을 옮겨 정교하게 조각된 액자 틀에 다다랐을 때는 금속으로 된 작은 작품 텍을 발견했다. 내게는 왠지 작은 금속조각이 성공한 화가의 표식같이 느껴졌다. 액자틀까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는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자신의 역사를 새긴 섬세하고 고귀한 징표 같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 이후로 좋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팔 수 있는 날이 오면, 나도 저 조그마한 금속의 표식을 반드시 액자 한 구석에 달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정말 떠나기 싫었지만, 지금과는 또 다른 느낌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복도로 나왔다. 아까 그 소년은 약간은 풀이 죽은 채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소년에게 잠시 시선을 주고는 들어올 때처럼 크게 "후"하고 숨을 내쉬고는 마지막 전시실로 향했다.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많이 아주 많이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작품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정말 뜻밖이었고, 도저히 뿌리 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마르크 샤갈의 그림이었는데, 작품 속에서 사람이 닭에 올라타 온몸을 휘어 감은 것처럼, 그림도 나의 사방을 가로막고 오로지 작품 앞에 서는 길만 남겨 둔 것 같았다. 작품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동안은 잠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와있는 것 같았다. 아픈 다리도 멀리 타국에 와있다는 느낌도 없이, 누군가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는 것 같은 따뜻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도 종종 그 순간의 느낌이 떠오를 때가 있다. 색채나 조형의 이미지보다 온몸으로 느꼈던 감상이 이토록 오래 머무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뜻밖의 행복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샤갈이라는 화가는 기억 속에 영원히 따뜻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샤갈의 그림이 있는 방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 살바도르 달리, 에드워드 호퍼 등 유명한 작가들의 그림도 있었다. 교과서에서나 볼 그림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니, 짧게 지나가는 순간이 아쉬워 영원히 잡아두고 싶어 연신 카메라 셔터만 빠르게 눌러댔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을 빠져나오니 이미 해가 넘어가며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마드리드까지 온 김에 프라도 미술관 외관이라도 보고 가자는 생각에 길을 건너가 벨라스케스 동상에게 인사를 건네고 뒤를 돌았다. 때마침 해 질 녘 하늘은 지금까지 만났던 작품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잊지 못할 마드리의 명장면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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