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사람들은 흔히 '작가님'이란 그럴듯한 호칭으로 나를 불러주지만, 그 '작가님'이란 존재는 이전에 내가 표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곧알게 되었다.
"그림을 그려야겠다,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야겠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2018년,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첫 발을 내디뎠다. 사실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늘 꿈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것은 꿈보단 망상에 가까웠다고 해야 맞다. 실험실에서 PCR을 위한 아가로스 겔을 만들면서도나는 늘 그림쟁이를 꿈꿨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금의 용기는 있었는지, 망상을 잡으려는 시도를 했다. 밥벌이를 위한 디자인을 공부하고 곧 취업을 했다. 그러나 회사생활이 영 맞지 않아 사회인 8년 차에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처음 1년 동안은 이대로이면 굶어 죽든 심심해 죽든 둘 중 하나겠거니 할 만큼 일이 없었다. 그래도 2년 차부터는 협업으로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를 통해 프리랜서 동료들이 생기고, 일감을 주고받기도, 또 함께 활동 그룹을 조직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했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진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취향과 기호에 맞춘 그림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서 그릴 수밖에 없는 것들을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내가 왠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미술사를 공부하며 그림을 주문을 받지 못한, 즉 선택받지 못한 작가들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그림을 그려 시장에 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 우울해지기도 했다. 늘 시소를 타듯 가벼웠다 무거워지는 마음과 생각을 붙잡으며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림과 내 미래를 동시에.
그런데그렇게 그렸던 그 그림들이 팔렸다. 정확히는 '모두'팔렸다.
2021년 11월 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전국에서 2위 매출을 기록한다는 대형 백화점에 그림을 걸었다. 총 15점. 전시 디스플레이를 마치고 바라봤을 때,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는 별개로 내가 할당받은 전시 벽면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팔고야 말겠어'
아트페어를 준비하며 외주작업, 외부강의와 개인수업, 또 다른 전시와 마켓을 동시에 병행했다. 많은 프리랜서들이 공감하겠지만 일이 몰아치는 계절이 계속되진 않는다. 곧 일이 없어질 겨울을 생각해서 정말 밤낮없이 일했다. 그러면서 더 이를 악물었던 것 같다.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꼭 각인시키고야 말겠다는 나의 첨예한 의지는 부드러운 그림들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을 것이다.
10일간의 전시와 판매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인들과 가족들은 신기해하고 기뻐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스스로에게 감정을 물어야 했다.
'그림을 팔아서 좋아? 기뻐?'
나는 전시가 진행되는 가운데도 치열하게 생계를 위한 다양한 부캐들을 소화하고 마감을 쳐내고, 그러다 가끔 시간이 나면 지하철을 타고 작품이 전시된 공간을 방문했다. 그리고 내 그림을 봐주는 사람들과 그 분위기와 이미지를 열심히 눈과 마음에 담았다. 그림이 팔려서 좋은지는 몰라도 그렇게 몰래 뒤에서 그 장면을 바라볼 땐 참 좋았다.
내가 좋아하고 훌륭하다 생각했던 작가들과 함께 전시해서 기뻤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줄 기회가 생겨 기뻤다.
전시 철수 날 팔린그림들과 소중한 응원의 마음들을 차곡차곡 싣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 비로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림이 팔린 빈 벽면은 이제 곧 새로운 그림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표면적인 그림이 아니라, 그 이면에 채워질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함께 공감하고 읽어줄 또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며 이제 다음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늘 그림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야 할 때 내가 되뇌는 구절이 있는데,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빈센트 반 고흐를 이야기했던 문장이다. 이것으로 긴 TMI를 마칠까 한다.
그는 돈 많은 감식가의 마음만을 만족시키는 세련된 예술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위안으로 채워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