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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Nov 11. 2024

우여곡절 경주페스타 2024.

    

올해도 어김없이 경주 페스타가 열렸다.

올해 6회를 맞는 경주페스타는 10월 하순에 열리는 연중행사인지라 미리 참가여부를 정할 수 있다. 절실하다면 그즈음을 비워두고 아니면 고지가 뜨고 나서 상황에 따라 결정해도 된다. 하지만 일정보다 중요한 것은 동행, 즉 룸메이트가 우선 되어야 한다. 물론 모임이나, 또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과 같이 그릴 수는 있지만 그들도 그들의 동행이 있다. 끼워주기도, 무작정 끼기도 살짝 눈치가 보인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룸메이트, 룸메이트 역할은 ‘챙겨주기’다, 그림 여행도 여타의 패키지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아 식사 때나, 이동할 때, 서로를 챙겨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잠시 한 눈 팔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사라지고 나만 남았을 때의 황랑함, 그러므로 웬만한 열정을 지닌 어반러가 아니고서는 혼자는 외롭다. 대중 속의 고독이 혼자의 고독(일명,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 보다 더 외로울 수도 있다. (겪어보지 않아서 감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이유로 동행이 정해진 다음 기차표, 숙소 예약을 한다.

      

작년, 재작년, 두 번 참가로는 미련이 남아 가능하다면 다시 가고 싶었다. 여기서 ‘가능’의 속뜻은 ‘동행이 있다면’. 마침 누드 크로키를 같이 하는 선생님과 쿵 짝이 맞아 봄부터 손가락을 걸었다.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세상사에 두 계절 뒤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단 동행이 정해지면 ‘다 된 밥’이나 다름없다. 8월 초, 마침내 공지가 뜨고 발 빠른 전국 스케쳐스의 기차, 숙소 예약이 시작되면서 나도 부지런히 손가락 품을 팔았다. 경험삼, 시작과 동시에 마감이 뜨니까 얼리버드가 답이다. 첫째 날은 교촌마을의 ‘석등이 있는 집’, 둘째 날은 좁은 한옥 방의 고생을 만회할 편안한 호텔(트윈 베드)로 예약을 했다. 석등집은 개조하지 않은 백 년 한옥으로 집 자체도 고풍스럽지만 마당에서 바로 보이는 월정교(야경포함), 정원의 석등과 오래된 수령의 모과나무 등 툇마루와 마당에서만 종일 그릴 수 있어 재작년 우연히 카페에 들렀다 반해 혼자서라도 오고 싶었던 곳이다. 호텔은 편히 쉴 수 있고, 객실에서 창밖 뷰도 그릴 수 있어 또한 선호하는 숙소, 동행과 연신 상의하며 알찬 구성에 내심 흡족해 일찌감치 예약을 마쳤다.



      

그렇게 경주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행복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동행이 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비췄다. 인터넷 쇼핑에서의 취소, 환불 기간인 한 달도 지난 시점, 이미 스케쳐들은 끼리끼리 숙소 예약을 마친 상태라 황당했다. 무엇이 잘못 됐을까?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세상사는 수학이 아니니 풀 수 없는 문제는 패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기도 한다) 방법은 다른 동행을 구하는 것인데 문제는 두드릴 문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 안되면 올해 경주는 쿨~하게 패스하기로 (나는 패스 병 환자). 하지만 그렇게 패스됐다면 애당초 이 글은 써지지 않았을 터, 이야기에는 조미료 같은 반전이 필요하다. 나의 딱한(?) 처지를 듣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선생님이 “그냥 우리랑 같이 자요”. 구세주는 이럴 때 쓰는 말! 구세주는 신박한 작전명을 제시했다. ‘낑겨자기’. 얼마만의 불편(?)인가. 갑자기 여행이 재밌을 것 같은 예감..

그래서 경주 페스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낑겨자게 된 한옥 숙소는 사실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단톡방 운영진 한 사람(구세주에 이어 천사 출현)이 깃발을 들고 숙소 예약 공지를 띄우자, 우르르 사람들이 몰리면서 그 숙소를 스케쳐스 30여 명이 통째로 빌리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이미 위에 말한 두 곳 예약을 마친지라 아쉽게 입맛만 다셨는데 구세주의 숙소가 거기였다. 그때 생각은 그랬다. 여행지에서 숙면은 기대할 수 없으니 잠자리 불편은 감수하고 그림만 많이 그리리라. 식당 웨이팅 중에도, 술 마시면서, 새벽에도 밤에도, 그린다고 아무도 탓하지 않는 게 스케치 여행이고 그 맛에 가는 거니까. 하지만 숙소에 들어서는 순간 불현듯 재생되는 영상이 있었으니 비록 리모델링되고 주변은 바뀌었지만, 대청마루 툇마루가 있는 미음자 형식의 한옥은 50년 전 초등학교 수학여행 숙소와 꼭 닮아있었다. 중정 같은 마당에서 엄마가 처음으로 사준 분홍색 나일론 잠옷을 자랑하듯 입고 놀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난생처음 느꼈던 나일론 잠옷의 부드러운 감촉은 아직도 생생한데 50년이 지난 후 다시 수학여행을 온 것이다. 그래서 경주 페스타는 반장의 깃발아래 밥도, 사생지도, 저녁 술자리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는 수학여행 컨셉으로 급변경되었다. 밤에는 문밖 가로등불 아래에 모여 야경을 그리고 아침에는 밥을 기다리며 툇마루에 둘러앉아 뒷 뜰을, 담벼락을 그렸다. 따스한 햇살 아래 점점이 흩어져 고개를 숙인 채 그림 삼매경에 빠진 스케쳐들의 평화로운 모습, 같은 숙소에서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편안함과 친밀함,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호사에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는 게 맞고 살까? 말까? 할 때는 안 사는 게 맞다. (내 지론). 이유는 집을 떠나야 뭐라도 배운다는 사실,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은 스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반면교사로 남기도 한다. 작년 재작년 각자도생과는 180도 다른 올해의 단체행동, 스케쳐스의 독립군과 연합군은 둘 다 필요하다. 단지 비율면에서 개인차가 있을 뿐. 올해는 연합군이 승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전화위복, 새옹지마.



올해로 여섯 번째 경주 페스타, 마지막 페회식 날,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흩어져 있던 스케쳐들이 모이고 광장은 감탄사로 넘쳐난다. 오랜만의 만남에 '어머머!', 그림을 보면서 '와우!'. 폭죽처럼 쏘아지는 감탄사에 축제장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들썩인다. 

폐회식을 마치고 경주역 가는 택시에 우연히 동승한 제주 챕터장 유딧님, 견물생심(?)일까. 대화중 “제주 페스타는 안 되나요?” 내 물음에  다섯 번째  경주 참가라 유딧님은 처음 듣는 질문이 아닌 듯 이런저런 사정을 들려준다. 페스타는 그대로두고 앞의 도시이름을 바꾸면 어떨까? 목포페스타, 제주 페스타, 군산페스타, 가고 싶은 도시들을 넣어보지만 희망사항일 뿐, 세상은 뜻대과 무관하게 돌아간다. 패스~. 


경주 페스타 삼세번, 이제 경주는 미련없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잠시 재우기로. 내년에 호재가 생겨 ‘삼세번의 법칙’을 넘는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생길 테니 걱정할 필요 없이 내년일은 내년으로 패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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