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대하는 자세
난 이름을 두 번이나 바꿨다. 족보에 실린 것까지 셈하면 이름이 네 개나 된다.
언젠가 이름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분노’와 관련해서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약간은 촌스러운 ‘식’ 자 돌림 이름의 ‘영식’, 그리고 그 이름은 너무 촌스럽다며 공부 꽤나 하신 삼촌이 지어준 ‘영성’,
군대를 제대하고 부모님의 권유로 바꾼 ‘민성’, 그리고 연기 활동을 위해 바꾼 이름 ‘무건’
‘榮’ 영화 영이라는 한자에 담긴 뜻은 나무에 횃불을 둘 씩이나 밝혀 대상의 앞날이 밝게 빛나는, 영화롭고 영예로움을 나타내는 한자다. 당시 철학관의 설명을 곁들이자면 ‘성명학’에서는 이름으로 쓰면 안 되는 한자라 한다.
게다가 내 사주가 큰 불을 뜻하는 병화 일주이며, 사주팔자에 ‘화’, ‘목’이 각각 세 개씩 있어 언뜻 있는 그대로 해석하자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인데 ‘영화 영’ 한자에는 ‘불 화’가 두 개나 더 들어가니, 성격이 불 같을 수밖에.
이름에 성격을 갖다 붙인다는 게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아무튼, 어쨌든 그랬다. 내 성격은 불 같은 면이 있었고, 평소에 거 거칠거나 사나운 편은 아니었지만 다혈질이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상대를 굴복시켜야만 불이 꺼지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어쩌면 누구나 그런 면이 있을지 모른다.)
사주가 그러하니 이름과 조화롭지 못하고, ‘ㅁ,ㅂ,ㅍ’ 등 한글 중 물의 성격을 띠는 발음을 가진 글자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며 받은 이름이 ‘민성’. ‘旼’ 하늘 민이라는 한자를 쓴다. 보통 이름엔 ‘옥돌 민’ 자를 많이 쓰지만 바로 윗 항렬의 삼촌이 가진 한자와 같이 쓰면 안 된다며 선택된 한자다. ‘하늘 민’은 온화, 가을 하늘 등을 뜻하는 한자로 실제로(믿거나 말거나) 개명을 한 후에 내 성격은 눈에 띠게 많이 부드러워졌다. 맞서 싸우기보다는 화합하는 쪽으로 성격이 기울었다. 물론 개명 전에도 쌈닭처럼 싸움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혹은 아버지의 일로 세상의 쓴 맛을 많이 봐서, 정말 개명을 했기 때문에, 여러 이유 등으로 나는 조금 더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성격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대 거의 끝에, 연극을 같이 하던 배우들과의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나를 흉내 냈는데, 나 말고는 모두 자지러지게 웃는 것이다. 그 모습은 불 같이 화는 났지만, 애써 침착하고 냉정하려는 듯한, 말투는 부드럽지만 호흡이나 목소리는 격양된, 모순된 모습이었다.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나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그 불을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자주 고민하고, 연습한 끝에 나는 불이 커지기 전에 잠재우는 어떤 방법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단지 ‘알아차림’이었다.
일단 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면 나는 그것을 조절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 예민하게 나를 관찰하고 마음을 들여다본 것이다.
마음이라는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점점 그릇이 뜨거워지는 걸 느낀다면 내려놓는 것이다.
거기서 아무 생각 없이 그릇 안에 연소될 재료를 넣는다거나, 그릇에 바람을 불면 그대로 ‘활활’.
어젯밤 배우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너는 화내는 모습이 상상이 안돼, 너도 화를 내?’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놀라웠다. 나는 생긴 것도 순둥 한 편이 아니고, 마음을 풀어줄 만큼 잘 생긴 얼굴도 아니어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불 같이 화를 내 본 것이 몇 년 전인지 세어지지가 않았다. 스스로 그 마음을 잘 조절해왔노라 자만하려는 찰나, 정신과에서 분노에 관한 내용으로 상담을 받고 왔다는 친구가 이야기를 전해줬다.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그 친구가 분노에 대한 질문을 하자 상담 선생님은 ‘ 분노를 담는 하드 디스크 용량이 커졌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답했단다.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말이었다.
마음이 점점 커 지는 것이다. 조금만 어떤 마음이 담겨도 찰랑찰랑 넘치던 그릇이 이제는 충분히 넓어진 것이다.
사랑, 미움, 분노, 죄책감…
온갖 마음들이 조금만 들어차도 철썩철썩 요동치고 넘쳐흐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커다란 항아리가 생긴 셈이다.
나의 새로운 이름 ‘무건’은 ‘戊, 천간 무’와 ‘虔, 공경할 건’이다.
천간 무는 사주에서 천간 자리에 쓰이는 큰 땅을 의미하는 ‘무토’에서 쓰이는 글자며, 건은 말 그대로 공경하며 강하게 지키는 뜻을 가졌다.
이름을 바꾸는 것이 성격과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치겠냐며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름을 두 번이나 바꾼 내 입장에선 귀찮기 그지없는 개명이라는 절차를 ‘그냥’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새로운 이름처럼, 마음을 담는 커다란 나의 그릇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분노가 사라졌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음이 커질수록 상대가 이해되고 상황이 짐작되어 분노의 대상이 사라졌을 뿐이다.
마음이 뜨겁고, 아프게 아려 올 때가 종종 있다.
그릇은 넘치지 않았지만, 그 열을 쏟아낼 방법도 대상도 없기 때문에 천천히 오래 뜨거운 것이다.
그릇이 큰 만큼 열기도 강하기 때문에 주변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럴 땐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
정처 없이 걷거나, 시원한 녹음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식히거나, 혼자서 떠나는 것이다.
충분히 열이 식을 때까지 들여다보고 기다리는 것이다.
항아리를 불에 구워 더 윤기 나고 단단하게 만드는, 마음을 가꾼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 정성을 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