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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sueproducer Apr 26. 2020

[Ep2-26]편견과 차별은 도처에 널려있지

<한국이 싫어서> 문학기행, 열번째 이야기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다가 발견한 호모 카테고리쿠스라는 용어가 있다. 인간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범주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성별, 나이, 직업, 종교, 출신국가 등 많은 범주를 만들고, 세상을 여기에 맞춰 분류한다. 또 범주를 구분 짓는 독특한 특징을 찾아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은 외모에 집착해.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야.’ 또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혈질이야. 일본 사람들은 속을 알 수가 없어.’등의 국민성을 판단하는 특징들을 찾아내 하나의 범주로 단순화시킨다. 여자들은 수학을 잘 못 한다거나 운전을 잘 못한다는 말이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나약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에 얼마나 동의하는가. 단순히 그 집단의 특징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그 속에 차별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이런 인간의 특성은 대상을 쉽고 빠르게 이해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구분 짓는 과정에서 정보를 단순화하고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 오류까지 생긴다는 문제가 있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을 쉽게 단순화하면서 일부 특징을 과하게 일반화한 결과가 편견이 된다. 이 편견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 개개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 하나의 범주로 묶어 사고하기 때문에 자칫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여자라서 못할 거야, 흑인이니까 안돼. 동양인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라는 편견이 그들이 가질 기회와 권리를 박탈한다.


우리는 다른 것을 이해 못 하고, 무서워하고, 그래서 싫어하곤 한다.


최근에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두가 민감하던 때, 친한 동생이 지하철에서 중국말을 하는 사람 옆에 앉아 있다가 슬며시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래놓고는 “내가 한 것도 혐오 아닐까?”라고 물어오길래, ”글쎄, 네가 그 중국인에게 대놓고 뭐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동생은 그 사람들을 개개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에 혐오였다고 셀프 답변을 내놓더라. 조금 답정너이긴 하지만, 자기반성을 잘하는 동생 덕분에 혐오와 차별에 대해 좀 더 넓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드러내놓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만 차별과 혐오라고 생각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도 노골적인 차별은 나쁜 것이라 말하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게 차별과 혐오를 행하고 있다. ‘나는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며, 이건 차별은 아니지.’ 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행한 차별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아예 차별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못 할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이 한 것이 차별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그 행동의 대상을 자신에게 투영해보면 된다. 자신이 차별을 당할 때는 금방 알아차리게 되니까.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내가 할 때는 별생각 없다가 당하면 기분이 나쁘다. 다시 코로나 바이러스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의 예시로 돌아가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인에 대한 입국을 금지하자는 청원이 올라갔고, 중국인이라면 무조건 그들을 피하곤 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다른 나라에서 입국 금지를 당하고 코리언=코로나라며 차별하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차별이 아니라고 우기며 차별을 행했지만, 역으로 차별을 당하자 그제야 발끈하는 거다.

 

계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긋지긋한 차별과 줄 세우기 논리에 지쳐서 한국을 떠나왔지만, 호주에서 만나는 한국인을 배움의 정도로 은근히 나누는 모습을 보인다.


재인이 “넌 왜 이민 오려는 건데?”하고 묻더라.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그렇군. 나도 지잡대 나왔어. 같은 처지야.”
 재인이 웃으며 말했어.
“난 홍대 나왔는데?”
그 순간 재인의 표정이란! 좀 미안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통쾌하기도 하더라. (p.44)


미안하면 미안하지 왜 통쾌함이 덧붙여지는 걸까. 차별은 돈이든 권력이든 무언가 가진 자가 하는 것인데, 차별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감정은 우월감이다. 그러므로 계나는 재인이와 같은 유학생 신분임에도 그 안에서 구분 짓기를 한 것이고, 자신이 기득권에 편승하는 것 같은 통쾌함을 느낀 것이다. 자신은 동양인이나 유학생 신분으로 차별당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한국 대학 서열이라는 축을 가져와서 차별하고 있는 계나. 비단 계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차별을 당하면서도 또 차별을 한다.


한국에서의 모든 줄 세우기와 구분 짓기는 여기서 시작됐을지도


계나가 만났던 인도네시아인 남자친구 리키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한국 애들은 제일 위에 호주인과 서양인이 있고, 그 다음에 일본인과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지. 그 아래는 중국인, 그리고 더 아래 남아시아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사실 호주인과 서양인 아래 계급은 그냥 동양인이야. 여기 사람들은 구별도 못 해. (중략) 사실 남아시아에서 온 애들이 더 잘 살아.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온 애들은 그 나라에서는 잘사는 애들이거든. 반면에 일본에서 온 애들, 한국에서 온 애들은 다 가난한 집 출신이잖아. 너희 나라에서 좀 사는 집 애들은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지.” (p.85)


리키의 뼈 때리는 말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호주까지 가서도 스스로 인종차별을 하는 동시에 당하기도 하는 모순을 겪는다. 구분 짓기를 통해 차별을 받는 집단에 속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권을 누리는 집단에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인종이라는 한가지 잣대로만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 뿐 아니라, 집안의 재산이라는 부의 척도로도 차별할 수 있다. 즉, 차별은 한가지 잣대로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보다 차별받는다고 해도, 외국인 남성과 비교하면 한국인 여성이 더 차별받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한국인 여성이 장애인이거나 외국인 남성이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거나 하는 다른 요인이 더해지면 차별의 정도는 더 가려내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차별은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다.


계나가 다시 한 번 자신의 태도를 돌아봐야 할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은 차별이 없는 100% 완벽한 천국을 바라고 있지만, 자신의 태도에는 편견이 가득하다. 자신과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계나는 혜나 언니와 동생 예나의 삶을 답이 없고 답답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국에서 결혼한 친구들의 삶도 속물적이고 발전이 없는 삶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무시한다. 계나가 어디에서든 진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에 편견을 담아 구분 짓는 일은 가능한 멀리했으면 좋겠다. 내가 쏜 화살은 언젠가 부메랑처럼 나에게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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