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폴리오 '트래블'은 작가와 함께 폭넓은 스테이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글ㆍ사진 ㅣ 박선영
제주 조천의 와흘리로 향한다. 이국적이면서도 정겨운 ‘와흘’이라는 이름 때문에 가는 길이 더욱 설렌다. 옛부터 마을 사람들이 ‘논을’ ‘눈을’이라고 불렀다는 ‘와흘’의 뜻은 ‘넓게 펼쳐진 큰 숲’이라고 한다. 마을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밭담집에 도착했다. 대문 앞, 불쑥 키가 큰 나무가 이 집의 정령인 양 늠름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대문 너머로 슬쩍 드러난 밭담집은 여러 채 돌담집이 마당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앉아 있는 꼴이다. 마당에는 키 낮은 제주의 식생들이 풍성하게 피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꼬랑사초와 말똥비름의 어우러짐이 가을녘 공기의 공백을 채우는 듯 했다.
밭담은 돌을 쌓아 밭의 경계를 구분하던 제주 지역의 낮은 담으로 밭담집은 '밭담으로 둘러싸인 집’을 뜻한다. 주변은 광활한 귤밭이 펼쳐진다. 귤밭 그리고 밭담집 사이, 담이라고는 하지만 경계와 구분이 아닌 공존에 가깝다. 이곳과 저곳이 하나로 아우러지는 풍경의 형국이랄까.
밭담집은 작은 여러 채의 집들로 구성되는데 안채, 바깥채, 아랫채가 저마다의 기능을 품고 손님을 맞이한다. 목욕을 하려면 침실을 나와 건너채로 가로질러가야 한다. 바깥으로 나가 땅을 밟고 몸을 움직여야만 공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재미난 묘미다.
집의 중심이 되는 안채 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풀었다. 오래전에 쓰여진 상량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서까래 아래 거실과 주방이 아늑하다.
안쪽의 침실에는 네 사람이 묵을 수 있는 새하얀 매트리스 두 개가 놓여 있는데, 양쪽의 두 개의 작은 창이 바깥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잠결이 포근할 것만 같은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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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나와 잠시 호흡을 고르고, 선반에 준비된 차를 꺼내 우리기 시작했다. 큰 통 창이 맞은편 바깥채와 정원의 푸름을 담아낸다. 아침까지 내린 비를 머금은 탓인지 초록은 더욱 싱그러웠다. 상기된 마음을 차로 다독이며 음악도 없이 한참동안 그 고요를 만끽했다.
어느새 해가 저멀리서 저물고 있었다. 바깥채로 건너갔다. 온습한 공기가 일순간 온몸을 감싼다. 내부에는 온탕과 사우나를 바깥 데크에는 작은 풀장을 갖추고 있는 ‘수공간’이다. 물 위로 붉그스름한 하늘이 비추고 있었다. 가운을 벗고 온탕에 조심스레 발을 담궜다.
몸이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갈 정도의 완벽한 온도였다. “아!” 짧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슬라이딩 도어를 모두 열어두니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진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물의 표면이 찬공기와 만나 서서히 식어간다.
망막에 걸리는 건 귤밭과 너른 하늘 뿐이다. 아직 탱글탱글한 초록의 과실이지만 곧 영글어 밭을 귤빛으로 물들일테지. 욕조 수전 옆에 가지런히 놓인 바스 솔트를 두 스푼 가득 넣고 녹인다. 물에 몸을 담근 이 허물없는 상태를 특별히 사랑한다. 스스로 모든 허구와 근심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목욕을 ‘자연의 맥락 속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가장 섬세한 행위’라고 표현했듯이 말이다. 물 안에서 와흘의 저 너른 귤밭 한가운데를 응시하다보니,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보다 제주와 더 밀접히 닿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온도를 높여 놓은 사우나에도 잠시 들어가 남아 있는 약간의 긴장을 풀었다. 밭담집이 섬세하게 갖춰놓은 면면들은 여럿이면 여럿인대로, 단둘이면 둘인대로의 다양한 모양새로 향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랫채는 가장 작은 공간이다. 마치 오롯한 명상의 방처럼 어둡다. 거친 내벽에 길다랗게 수평창이 뚫려 있으며 낮은 조도의 빛이 공기처럼 깔려 있다. 그리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베드. 다름아닌 테라피를 위한 공간이다.
어쩌면 쓰임을 찾지 못했을 작은 공간의 놀라운 자기발견이다. 차분한 사운드와 아로마 오일, 싱잉볼, 온장고에는 스팀 타월이 데워져 있다. 베드를 덮은 부드러운 리넨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욕탕에서 바라보았던 풍경이 잔상이 되어 떠돌기 시작했다. 여행 메이트의 나른한 손길이 아로마 오일과 함께 내 어깨, 목 주변의 근육을 가볍게 풀어주었다. 잠이 스르르 들 뻔 했으나, 명상 음악이 의식을 편안하게 붙잡아주었다.
밭담집에 머물다보니 절로 호스트의 마음과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이곳을 처음 마주할 때, 게스트가 어떤 마음이길 바랬을까? 혹은 어떤 마음이기를 상상했을까? 편안하면서도 생경한 경험. 이 밤에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밤공기의 알싸함은 내가 사는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세상에 홀로 남은 듯, 주변을 감싼 고요함도 마찬가지. 그 순간 얼굴을 모르는 호스트와 이신전심을 이룬 듯한 느낌을 가졌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인상을 이야기했다.
“여기 이렇게 누워 오늘 밭담집에서 보고 감각한 모든 걸 떠올려보니, 마치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품고 있는 풍경일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동그스름한 귀여운 귤나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돌담, 툇마루에 앉아 있을 때의 촉감, 저 너른 하늘녘의 색들 말이야.” 이 말을 끝으로 잠이 들어버렸다.
여행지에서는 늘 부지런해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른 아침. 지붕을 무섭게 때리는 폭우가 새벽녘의 잠을 잠시 깨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멀리서 해가 반짝인다.
제주에서는 맑은 날을 바라고, 궃은 날씨를 염려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며칠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무시로 찾아오는 비와 바람은 초연히 대하고, 구름 한점 없는 화창함과 햇살은 감사로 만끽하면 될 일이다. 예측할 수 없어도 자연은 늘 너그럽다.
간단히 과일과 허브티로 시작하는 아침의 첫끼는 여행지에서 더욱 특별하다. 선반의 가지런한 접시에 담은 사과와 복숭아에 밭담집이 준비해 둔 녹차와 쌀과자를 곁들였다. 해가 중천으로 올라 툇마루를 달궜다.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마당의 풀내음을 더욱 진하게 들이켰다.
흙을 밟고 풀과 꽃잎을 어루만지며, 자연과 접촉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스테이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가볍게 와흘리 마을을 산책하고 돌아와 다시 대문을 들어서니 하루새 새롭게 갱신된 밭담집이 보였다.
떠날 채비를 해야 할 투숙객에게 안겨주는 정스러운 화답인걸까? 하룻밤의 이 풍성한 여운을 절반은 내 일상으로, 나머지 반은 밭담집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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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er 박선영
<독일미감> <유럽호텔여행> <SEOUL SEOUL SEOUL>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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