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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tenjohn Sep 24. 2016

나이롱 독서광, 다독多讀과 정독精讀 사이에 서다

노상 습득 노트 탐독기 5


 지난 며칠 동안은 눈앞에 스치는 모든 텍스트가 잘못되지는 않았나 주의 깊게 살펴보는 병이 생겼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면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잘못 적힌 것들이 참 많았는데, 매일 지나다니던 곳에서 그런 것을 발견했을 때는 나름 큰 충격에 빠졌다. 그렇게 생긴 강박은 책을 보는 와중도 이어져서,  오탈자를 찾는 데 신경이 쓰여 도리어 내용을 놓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 다시 몇 페이지 전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고, 문득 또 어느 페이지에서 멍하니 표류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갑자기 생긴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내린 단 하나의 결론은 다시 노트를 읽는 것이었다. 거기서 비롯된 병이니 그걸로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 같은 것이었다. 암튼, 나는 다시 노트를 폈다.



 

 도서관 대여 책 수 : 총 284권


  사람은 일생동안 몇 권의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일단, 몇 년간 빌린 저 284권의 책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하나하나 꼼꼼히 분류해보지는 않았지만, 저 중에 아마도 가장 많이 빌렸던 책들은 아마 인문학 쪽 책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한 절반 이상? 그리고 그다음은 소설, 시, 에세이 등 이른바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책들일 것이다. 그중에는 대단한 고전이라고 칭송받는 책들도 있지만, 매우 대중적이고 재미를 위해서 쓰인 책들도 있다. 또한 잡다한 지식 채집에도 강박이 있어서 자연과학, 기술, 이런 책들도 지나치지 못했다. 그밖에 어학이나 실용 서적, 혹은 전문 자격증 시험에 관련된 책들을 아주 가끔 기웃거렸다.


 고작 몇 년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284권의 책을 빌렸다는 사실을 도서관 개인 정보의 대여 기록을 보고서 알았다. 이 기록에 남은 책들을 살펴보니 오랜 기간 소장할 목적으로 사들여 책꽂이에 꽂아놓은 책들과 대부분 다른 것들이다.(물론 같은 것도 있지만) 또한 소장가치 따윈 생각도 안 하고 어떤 순간의 기분에 따라 사서 책꽂이에 모신 책들과도 별개다. 거기에 누군가에게 빌려주거나 버린 책들을 따지면 내가 본 책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어떤 성과를 숫자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언뜻 엄청한 독서광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정말로 책을 좋아하시네요.’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 많은 책들을 제대로 다 읽으신 거예요?’라고 묻는다고 상상하면 솔직히 나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


 일단 인문학이라든가 자연과학 쪽의 비문학 책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순수한 흥미와 학문적 호기심으로 빌린 인문학 고전과 그와 관련된 2차 서적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공’과 ‘수업’에 관련된 책들로서, 그것들은 주로 과제에 필요한 부분적인 참고자료로 사용되었다. 나는 그 책들의 제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지만, 전체의 내용은 그저 ‘아는 것처럼 말하거나 넘겨짚어 상상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중 내가 읽은 것은 고작 몇몇 꼭지들이며 그나마도 지금 기억나는 것은 과제에 인용된 부분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인문학 분야에 관해 몇 년간 내가 제대로 읽은 책은 기껏해야, 그것도 아주 후하게 쳐서, 열 몇 권 정도라고 생각한다. 자연과학 서적은 더욱 적겠지. 다섯 권을 갓 넘겼을 것이다.


 문학 분야는 특성상, 특히 소설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기는 하다. 단순히 재미를 주기 위한 가벼운 작품을 읽거나 간단하게 인물과 사건을 요약하려고만 들면 속독速讀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서 구조를 파악하고 주제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읽으면서 여간 힘을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부류의 책들은 의미가 다양하게 파악되기 때문에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들과 내가 읽었던 문학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나 혹은 혼자서 조용히 떠올릴 때, 주인공 이름이나 그가 겪은 표면적인 사건 정도만 간신히 생각날 때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건지 깊은 한숨이 난다.



 많이도 읽었네. 뭐 보통 사람들에게 독서라는 게 그런 거 아닐까. 이런 것들을 읽어보았다는 안도감, 접했다는 우월감. 독특한 내용이나 문체에서 얻는 단기간의 깊은 인상. 자신의 취향을 알아내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 그래서 알게 된 자신의 취향이나 성향을 세련되게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위한 은유. ‘나는 이런 책이 감명 깊었어요’. 음악이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떠올릴만한 책 몇 권이 뇌 속에 갈무리되고 나면 그 뒤에 잘 읽게 되지 않는.



 미국의 한 대학교*의 학부 커리큘럼은 100권의 책을 정해 4년간 오로지 그것을 읽고 그것을 토론하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4년간 100권의 책이면 1년간 25권의 책, 한 달에 두 권 남짓의 책을 깊이 읽는 것. 그래, 사실 한 달에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의 총량은 그 정도일 것 같다. 그것도 무지하게 열심히 읽어야 하겠지. 저 커리큘럼은 사람이 4년에 100권 정도를 읽어낼 수 있다고 전제하는 거다. 그것도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대학생들을 가정하여 100권. 좋다, 모든 사람이 저 학교의 학생들처럼 4년에 100권을 읽는다고 치자. 식음을 전폐하지는 않는 선에서 60년을 읽는다면 1,500권 정도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한눈에 딱 담을 수 있는 책장은 다섯 개 남짓이었던 것 같다. 총 다섯 단쯤으로 구성된 책장의 한 단에는 보통 책 2~30권이 꽂힌다. 그렇다면 책장 하나에는 많아 봐야 150권 정도의 책이 꽂힌다는 거다. 책장 열 개 정도의 책이 우리가 일생에서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의 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릴 때 읽은 동화책 몇 권이 추가될까? 근데 이미 난 몇 년 사이에 284권이나 빌렸다! 책장 두 개에 해당하는 양이다.


 나중에 내용도 잘 기억이 안 날 책들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읽는 것이 과연 좋을까. 거기에 아직 확신이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 눈을 뜨고 있는 순간은 매초 숨을 들이마시듯 시각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보았다고 생각하지도 못 했던 것들을 나중에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겨넣었던 그 글자들도 내 머릿속 어디가에는 저장되어있다는 말인가? 근데 왜 나는 떠올릴 수가 없는 거지?


 뇌의 용량에 관한 한 연구에서 말하기를, 뇌의 용량은 약 250만 기가바이트, 2,500 테라바이트, 이름도 생소한 2.5 페타바이트 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마저도 확실하지는 않고, 다만 매우 크다는 것 정도를 알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기억은 버려지는 건지 아니면 어디에 숨어있다는 건지. 내가 본 책의 문장들은 정말로 영원히 버려진 건지 어느 가에 비집고 들어가 살아있는 건지.



 하긴, 나도 책을 꽤나 많이 읽고 사들이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지인들에게마저 책을 선물하고…. 그러나 마음 속에 오래 담긴 책은 고작 몇 권이었지. 지금은 제목도 가물가물한 책들.



 다독多讀과 정독精讀 사이, 내 고민의 지점이다. 스쳐 가는 문장들이 어떻게든 기억 속에 남아서 언젠가 꺼내질 것이라면 다독도 분명히 의미가 있겠지. 어려서부터 무의식에 지속해서 경험한 것들이 취향이 되고, 음성들이 말투가 되고, 그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하고 그런 것들을 보자면…. 그렇다면 다독을 통해 남겨질 여러 문장들은 비록 쉽게 기억에서 넣고 꺼내기 어렵겠지만 그것들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독 한다면 좀 더 의식적으로 읽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고할 수 있겠지만, 오・탈자를 여럿 찾아낼 정도로 정독했던 책들의 내용이 지금도 모두 잘 기억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정독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과연 많은 세월 다른 정보들로 덧칠된 후에도 다 기억이 날까. 그럼 차라리 아예 많이 읽는 것이 나은가?



 그래…, 신속과 정확은 반비례한다. 다양한 경험과 깊이를 두루두루 갖춘 2~30대 초반 인재를 찾는다는 개소리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하나만 파려고 하면 깊이가 생기기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여러 개를 하면 하나라도 끝을 보기가 어려운 세상.



 책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더 의미 있는, 무엇이 더 좋은 독서방법인지에 대해서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전 세계에 100권의 책만 있다면 정독이 훨씬 나은 독서법이라고 말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정독이 문장을 모두 꼼꼼하게 읽어서 책 안의 오・탈자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문장과 문단의 완결을 살피고 각 장 간의 유기적 연결, 책들간의 연결점까지 찾는 과정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다독에 가까운 독서를 하고 있는 이유는?


 이쯤에서 빌려서 제대로 다 읽지도 않은 284권 대여에 대한 변명과 다독과 정독 사이의 갈등을 양서 목록의 의미를 통해 생각해보자. 다양한 기관들에서 내놓은 숨 막히게 많은 양서良書 목록은(목록 안의 책 권 수뿐만 아니라 목록의 종류도 숨 막히게 많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는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읽어야 하는 책의 목록을 줄여 정독으로 이끄는 길잡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다독으로 드러나는 내 책과 독서에 대한 약간의 편력은, 그냥 두고두고 정독할 책을 찾는 여행이라고 해두자. 예를 들면, ‘마음속에 꼭 간직해야 할 몇 권의 책’의 목록을 오랜 기간 스스로 작성하는 과정. 남이 중요하다며 강조하는 것이 아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거기에 깊이를 더해줄, 여러 번이나 정독하게 만들어줄 책들의 목록을 만들어내는 과정. 내 삶의 양서목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다른 사람들의 양서목록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이미 그 목록에 몇 권의 책이라도 올랐다는 점은 제법 다행이다.



 고개를 돌려 책장에 가득한 책들을 쳐다보았다. 읽었음이 분명하지만 그 속의 문장 하나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책들이 태반이다. 저 가운데에는 분명 한때 가슴을 뛰게 만드는 책도 있었을 테고, 머리가 펑하고 터져버릴 것처럼 충격적인 책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 내가 정독하고 있는 것은 길가에서 주운 이 노트 하나뿐이다. 내가 스치며 경험하고 읽은 모든 것들은 좋은 화질의 영화 파일 50만 개 정도를 저장할 만큼 정도라는 머릿속에 잘 들어가 있나, 그래서 때때로 나도 모르게 잘 뿜어 나오고 있는 건가. 참 열심히 읽었던 책들도 있었는데, 그것들의 알맹이는 지금 내 어디에 숨어있는지.


 문득 언젠가 이렇게 책장을 바라보며 노트의 주인과 생각을 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로 그런 적이 꼭 있었던 것만 같다. 기시감, 아니면 숨어있던 기억이 나오는 건가, 아니면 생각이 복잡해질 때 느끼는 일종의 망상인 건가. 어떻게 무엇을 읽어야 할지 깊이 고민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 것만 같다.





* 미국 세인트존스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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