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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tenjohn Oct 11. 2016

산책, 생각을 위한 가장 훌륭한 딴짓

노상 습득 노트 탐독기 6


 비가 잔뜩 내리는 휴일 아침이었다. 전날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제법 많이 마셔서 그런 느지막이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람 많은 왁자지껄한 술자리는 언뜻 보기에는 즐거워 보이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면 지나고 나서 생각나는 건 사실 순간의 즐거움, 그뿐이었다. 짧은 근황을 나누고 지나간 추억들을 몇 개쯤 공유하며 허허거리다 보면, 어느새 서너 개의 모둠으로 나뉘어 제한된 사람들과 꼭 그 사람들과 나누지 않아도 될만한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디에서 요란하게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 영문도 모른 채 헐레벌떡 술잔을 함께 들어야 하는 것이다.  

   

 큰 술자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면 2차, 3차를 도모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술을 잔뜩 먹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는 건 이미 반쯤은 불가능한 상태다. 점점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가면 시간은 벌써 새벽을 향하고 있다. 택시에서 내려 들어오는 길에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기억이 나고… 눈을 뜬 지금, 밖에는 제법 세찬 비가 내리고 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찬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얼른 나가서 어디에선가 뜨끈한 국물이라도 몇 숟갈 떠 넣어야겠다 생각했으나, 비는 나가기 망설여질 정도로 내렸다. 비가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했으니 조금 더 기다리면 곧 그칠지도 모른다. 나는 비기 그치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찬물 한 잔을 더 마련한 후 간만에 노트를 펼쳤다.          



 응시하는 정확한 대상이 없이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을 우리는 보통 ‘멍 때린다’라고 표현한다. 

  

 눈을 뜬 채 어떤 행동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 (보통 타인이)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을 때 ‘빈둥댄다’라고 한다.

      

 대체로 눕거나 앉은 자세에서 눈이 감겨 있고(간혹 뜨는 사람도 있지만) 간헐적으로 행동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 행동을 외부세계와 연결 지을 수 없는 상태를 사람들은 그것을 ‘잔다’라고 표현한다.      


 ‘자기’, ‘멍 때리기’, ‘빈둥대기’는 일반적으로 ‘쉼’이라는 범주로 생각되지만 거기에 대한 가치 판단은 사람마다 제법 다르다. 다른이들과 비슷한 패턴을 가질 때에 한해 ‘잔다’는 것은 어떤 필연적인 휴식으로 인정받으며, 통상적으로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는 추가적인 행위가 용인되는 편이다. 하지만 ‘멍 때린다’와 ‘빈둥댄다’는 말들은 그 어감에서 알 수 있듯,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시간'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다. 한마디로 ‘의미 있는’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일 것이다. 

     

 ‘멍 때리기’, ‘빈둥대기’ 등의 의미 없는 행위의 영역을 간신히 벗어난 활동으로는 ‘음악 듣기(틀어놓기)’, ‘TV 보기(틀어놓기)’, ‘만화책 보기’ 등이 있지만 그것 또한 어떤 이들(부모님, 선생님 등 보통 뒤에 님 자가 붙으며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부대껴야 하는 특징이 있다)에게는 ‘빈둥대기’의 진화된 형태와 다름 아니다. 이들에게 심리적인 만족을 부여하면서 자신의 육체는 쉬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책 읽은 척'을 시도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면과 수면의 경계에 걸쳐서 눈은 뜬 채로, 가끔 책장을 넘길 수 있다면 거의 완벽한 수준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만전술은 육체의 편안함을 가져올지언정 온전한 정신의 해방을 도모하기에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다. 사바나의 물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톰슨가젤처럼 포식자(우리에겐 감시자)에게 지속적으로 신경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육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으로 가장 자유로운 정신 상태를 도모할 수 있는 행위 중하나는 바로 산책이라고 생각한다.     


 감시자의 ‘또 어디에 나가느냐’는 질문만 대충 얼버무리고 나올 수 있다면 비로소 자유인 것이다. 뭐, 일단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면, 근육의 긴장을 최대한 풀고 어느 새 온몸이 만들어낸 리듬과 관성으로 수십 분을 걸어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 외에는 중간중간 눈이 깜빡이거나, 심박 수가 조금 올라가는 등 내 의식밖의 일들 뿐이다. 


 또한, 산책에는 특정한 목적이 없으므로 물리적 구속을 벗어나는 것 뿐아니라 정신적인 자유도 보장된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런 생각이나 해도 된다. 내가 머릿속으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고 있든, 하얀색 도화지에 다시 하얀색 물감을 뿌리고 있든 스쳐 누구도 알아낼 도리가 없다.(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산책에는 ‘산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어있는 데다가 약간의 운동 효과까지 있으므로, 산책하는 동안은 나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정신승리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이 내가 뭘 생각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묘하게도 나를 스쳐 지나는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궁금함이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지우고 마냥 다시 걷다보면, 머릿속 어딘가 단단한 껍데기에 갇혀있던 공상이 조개 발처럼 스멀스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근엄한 유교 경전을 꺼내놓고 엣헴, 엣헴을 일삼았을 우리의 조상님들은 생각하기 좋은 곳, 책 보기 좋은 곳으로 말(馬) 위와, 자려고 누운 머리맡, 그리고 화장실을 꼽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들이 꼽은 이 장소들로 미루어볼 때, 그분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멍 때리고’, ‘빈둥대는' 것을 좋아했음이 분명하다.


 사람의 생각은 참 오묘해서, 생각을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황에서는 도리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극한의 침묵과 고요, 잘 갖춰진 시설, 거기에다 넉넉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기억이 없다.(아까운 독서실비!!!)      


 조상님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딱딱한 앉은뱅이책상을 벗어나 말을 타고 이동하는 바로 그 시간에, 온종일 노력했는데도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이 막 자려는 순간에 하필, 한지와 먹이 준비되어 있을 리 만무한, 거기에 적당한 육체노동(?)을 감내하고 있던 뒷간에서 좋은 생각은 떠올랐던 것이다. 떠올렸던 것이다.     


 다 갖춰지지 않아서 묘미가 있는 것은 산책길도 마찬가지이다. 산책하다 생각한 좋은 아이디어를 꼭 기록하겠다 해놓고, 돌아와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아쉬워서 메모장과 펜을 산책길에 들고 나가면...그런 날에는 갈무리할만한 좋은 생각을 건져온 적이 없다.

    

 막상 멍석을 깔아주면 아무것도 못하거나 안 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고약한 본성인 것 같다.     


 틈을 의도치 않게 아주 조금 주었을 때 사람의 생각은 갑자기 자라나서 밖으로 삐져나오려 몸부림친다. 모험 영화 속 빠르게 닫치는 비밀의 문처럼 그 틈은 좁고 짧기에, 그 틈이 생기면 생각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미친 듯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돼! 어서 내 손을 잡아!

아아! 이런! 생각의 문이 닫혀간다!   
 


 아무튼, 산책을 다녀오면 애초의 목표(책상으로부터의 도피)를 벗어나 뭔가 그럴듯한 것을 하고 온 뿌듯한 느낌이 든다.      


 하려고 갖춰진 상태에서 열심히 하는 때보다 딴짓의 틈새에서 원래 하려고 했던 것들이 더욱 잘 자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경험한다.


 어쩌면 좋은 생각은 딴짓에 대한 딴짓으로서만, 딴짓과의 대립으로써 자라는 히어로같은 것은 아닐까. 물론 좋은 생각을 꺼내려고 일부러 딴짓을 기획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좋은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 의도된 딴짓’은 좁은 틈새에서 웅크리고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에게 무작정 먹이를 들이미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나 나오라고 웃으며 손짓해도 그 새끼 고양이는 절대 그 틈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 자리에 먹이를 놔둔 채 포기하고 돌아서서 멀리 떨어져 걸어가야 그때야 슬며시 기지개를 켜며 틈새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법이다.

 

p.s 나는 편의점에서 얼른 뛰어들어가 메모장과 볼펜을 사서 결국 오늘 이 글의 얼개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쏴아아아.     


 노트의 한 꼭지가 끝이 났을 때 나는 화장실의 변기에서 일어나 막 물을 내리던 참이었다. 지나치게 과음했던 탓인지 어제 맞지 않은 음식이 있었던지, 암튼 속이 좀 불편했던 탓에 오랜 시간을 앉아있던 것 같다. 생각다운 생각을 해보지 않은 지 얼마나 지났던가.(또 생각다운 생각이란 무엇인가!) 내게 지난 몇 달 간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기사라든가, 말 같은, 어떤 자극에 대한 수동적 반응 같은 것들 뿐이었다. 나는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던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던가. 예전엔 좀 도리어 생각이 많은 축이었던 것도 같은데. 암튼.     


 글을 읽어서 그런지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지만, 조금은 일어나 돌아다닐 용기가 생겼다. 평일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주말에는 마치 당연한 보상인 것처럼 얼큰하게 술을 마시고는 다음 날엔 온종일 숙취로 생각을 틀어막지 않았던가.


 나는 문득, 산책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진짜 딴짓이 몹시 그리워졌다.


 밖에 나가 뜨끈하게 배를 채우면 한참이라도 걸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나는 순간에 어느 카페에라도 뛰어들리라 다짐했다. 하긴 처음부터 이렇게 마음먹으면 좋은 생각은 나지 않은 법이랬지. 그래도 어쨌든 나가보도록 한다. 얇은 잠바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다짐하듯 현관 밖으로 나왔고  

  


 빗줄기는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 삼상                             

所作文章 多在三上 馬上枕上厠上也(소작문장 다재삼상 마상침상측상야 ; 글을 짓는 데는 삼상이 좋으니, 타고 있는 말잔등 위, 잠자리의 베개 위, 측간-변소便所-이니라.)<구양수歐陽修 귀전록歸田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64219&cid=41748&categoryId=4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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