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입질이 왔구나!‘
미국 회사로의 이직을 위해 처음 링크드인에 계정을 만들고 내 정보를 올려둔 지 약 2주쯤 지난 후, 드디어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어느 한 회사의 리쿠르터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나에게 적합한 포지션이 있는데 이번 주 중 통화가 가능하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드디어 시작이라는 설레고 기쁜 마음을 최대한 억누른 채 통화 가능한 시간과 내 연락처를 함께 적어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결정된 통화 시간은 목요일 새벽 2시.
내게는 많이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아쉬운 건 나니까 당연히 그쪽 시간에 맞춰줄 수 있었다.
게다가 새벽엔 가족들도 모두 잠들어 있을 테니 오히려 더 조용하고 통화하기도 좋을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어떻게 첫인사를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내 소개를 좀 더 뭔가 있어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일 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며칠을 보내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책상 위에 공손히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약속 시간 10분 전부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 걸.
2시 5분이 지났는데도 전화가 걸려오질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시간은 2시 8분을 넘어갔다.
내가 혹시 미국의 시차를 잘 못 계산한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번호를 잘 못 알려줬나?
그렇게 초조해하던 중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울리는 스마트폰의 진동 소리.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Hello?”
스마트폰 너머로 태평양 건너에 사는 어느 외국인 남성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네트워크 사정이 고르지 못한 지 목소리가 자꾸만 끊겼다. 게다가 말은 또 어쩌면 그렇게 빠르게 하는지 그의 말을 도무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충 내용을 유추해 보니 자기는 어느 회사에 소속된 누구이고 이러이러한 포지션에 관해 일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링크드인에서 내 경력을 보니 적합해 보여서 연락을 했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물어보는 한마디.
“너 지금 혹시 한국에 있니? “
그렇다고 대답했다.
뭔가 느낌이 싸하다.
그러자 이어지는 그의 대답.
그는 내가 지금 미국에 사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지원자는 반드시 현지에 거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며 안타깝지만 이번엔 안 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좋은 자리가 생기면 또 연락 주겠다고.
그렇게 나의 첫 리쿠르터와의 통화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대략 총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통화 시간.
이 통화를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이 준비했는데.
뭔가 있어 보이게 준비한 나에 대한 소개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성공시켰는지에 대한 스토리도,
그 어느 것 하나 들려주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통화는 끝이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내게 다시 연락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미 난 그가 생각한 범주에 들지 않는, 그의 선에서 필터링시켜야 하는 수많은 지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 거주하는.
현타가 왔다.
전화를 끊고 잠시 책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집 앞 편의점으로 가서 맥주 한 캔을 샀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딱히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해외에 진출한 한국인 디자이너들은 많았지만 나처럼 유학경험도 없는, 게다가 나이도 적지 않은 한국인 디자이너가 한국에서 미국 회사로 바로 이직한 사례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길을 잃었다.’
그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난 몇 달간 들뜬 마음으로 상상해 왔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실리콘 밸리에서 늘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나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신나고 즐겁게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
나는 정말 그런 모습의 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하게 된 현실은 그날 편의점 앞 간이 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바라본 새벽하늘만큼이나 깜깜했다.
다음날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하며 아침 방송 라디오를 켜고 걷다가 노홍철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의 클로징 멘트를 듣게 됐다.
“여러분!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이 말을 듣는 순간 한겨울에 머리를 찬물에 담근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이렇게 주저앉고 포기할 순 없다.
나는 겨우 한 번의 작은 시도만 해 봤을 뿐이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선 계속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다.
간밤의 통화로 인해 잠시 의기소침해져 있었던 내게, 노홍철의 그 짧은 클로징 멘트는 내가 하고 싶은 미국으로의 진출을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상승시켰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노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그래.
길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그 길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