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언덕(wonder heel)에서 오르내리는 인생들.
우디 앨런의 신작 <원더 휠>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공책을 꺼냈다. 두서없는 생각들을 메모하다보니 노트 몇 장이 가득 찼다. 할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 시작부터 어렵다. 공책에서처럼 이 공간에 내가 쓰고 지운 글들의 흔적이 남는다면, 아마 그 위에 쓰여진 글씨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흔적이 아닐까. 웃긴 건, 그렇게 수없이 쓰고 지우면서 하려는 말이 인생무상이라는 점이다. <원더 휠> 역시 그렇다. 우디 앨런도 자신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말들을 쏟아내지만, 결론은 인생무상이다. 온갖 말들이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이 결국 덧없는 인생이라니.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데, 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성공한 감독, 우디 앨런이 하는 말이라 더 허무하다.
무엇하나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그 자체로 허황된 꿈이나 망상에 지나지 않는 환상을 좇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가 환상이 환상임을, 환상은 실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 그게 위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더 휠>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자신만의 환상에서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모인 공간, 영화의 배경은 실제 뉴욕 근교에 위치한 놀이동산인 '코니 아일랜드'다. 놀이동산은 유토피아다. 즉 놀이공원과 같은 환상 세계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종국에 인생무상을 느낄 우리 인간은, 그 환상의 세계를 원하고, 원하면 만들어내는 존재다. 그래서 그곳은 섬이 아님에도 '아일랜드'라 불린다. 그렇게 보면 환상이 허무하지만은 않은듯 하다. 어찌됐건 무언가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결국 놀이동산은 실재하는 유토피아, 즉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가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곳, 존재 자체가 모순인 세계다.
놀이동산에 수많은 놀이기구가 있는 것처럼 <원더 휠>의 인물들이 가진 환상 역시 제각각이다. 지니는 유망한 배우 지망생이었으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편이 있었던 시절을 추억한다. 허나, 남편이 지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지니가 한 번 외도를 했다고 해서, 지니와 지니와의 아들인 리치까지 버리고 영영 떠날 수 있었을까. 지니가 배우로서 가능성이 충분했다면, 성에 차지 않는 종업원 역을 연기하면서 살 필요가 있었을까. 지니의 남편인 험피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삶의 안정을 얻기 위해 자신과 가정을 꾸린 지니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의절한 딸, 캐롤라이나가 돌아오자 좋았던 순간만을 회상하며, 딸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기도 한다. 캐롤라이나는 갱스터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학교도 그만두고 부모와도 의절했지만, 결국엔 목숨에 위협을 받으며 갱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리치 역시 환상에 산다. 학교에 가지 않고 매번 영화관으로 샌다. 리치에게 영화는 자신을 둘러싼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드림머신인듯 하다. 재미있는 건 리치가 종종 불을 질러 지니와 험피를 곤란에 빠뜨린다는 사실이다. 우디 앨런은 묻는다. 도대체 리치는 타오르는 불에서 무엇을 보는 걸까. (그 답은 나중에 하도록 하자)
하지만 창밖으로 화려한 관람차가 돌아가는 동시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지니와 험피의 집처럼, 그들의 세계에는 환상을 뒷받침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어찌 보면 우리가 때때로 놀이공원을 찾아 하루를 즐기는 것처럼 환상은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그들의 삶은 나름대로의 균형을 갖춘 삶인지도 모른다. 현실에 살지만 품고 있는 환상을 놓치지는 않는 삶.
바로 이 지점에서 미키가 등장하여 그 균형을 무너뜨린다. 해변의 구조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미키는 울적한 마음으로 해변을 걷고 있던 지니를 발견한다. 그때부터 지니는 미키를 자신의 구원자로 여긴다. 미키와 캐롤라이나의 시작 역시 비슷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 미키는 캐롤라이나를 발견하고 차에 태워준다. 지니는 겉멋 든 작가 지망생에 불과한 미키에게 어떤 확실한 미래가 없음에도, 심지어는 캐롤라이나와 의심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미래를 미키에게 걸기로 결심한다. 캐롤라이나 역시 마찬가지다. 미키와 함께 떠나 새로운 삶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지니와 캐롤라이나에게 미키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허나, 이 모든 환상은 환상답게 모두 물거품이 된다. 근무 시간에 책을 보는 미키는 구조 요원으로서 자격이 없다. 겨우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사는 두 여자를 다시 환상으로 불러 들였으니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지니는 캐롤라이나와 미키가 만나고 있는 곳으로 갱스터가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니는 다시 험피의 곁으로 돌아가고, 캐롤라이나는 갱스터에게 납치되며, 험피는 다시 딸을 잃었다. 리치는 여전히 영화를 본다. 큰 일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모든 상황이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리지는 현실을 깨달아서인지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험피는 텅 빈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지니에게 멍하니 묻는다. 낚시에 가지 않을래. 지니는 답한다. 나는 낚시 안 좋아해.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관람차를 타는 것처럼 그저 몸을 싣고 풍경을 관조하는 경험과는 다르다. 인생을 관람차에 비유하려면 최소한 코니 아일랜드의 원더 휠처럼 오랜 세월 녹이 슬어 덜컹대는 관람차여야 한다. 현실은 너무나 고단하고 환상에 기대려니 무모하다. 현실과 환상은 어지로이 섞인다. 정확한 균형점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우리는 환상없이 현실을 견뎌낼 수 있을까. 환상의 세계를 '섬'이라 칭했지만, 따져보면 섬이 아닌 곳이 어디 있는가. 모든 세계가 망망대해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지 않은가. 결국 인생은 환상이라는 언덕(wonder heel)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언덕 너머에서 우리가 봐야할 것은 리치가 지른 불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디 앨런은 불의 온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리치는 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불을 쬐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어린 리치에게도 세상은 너무 냉하기만 했다. 허나, 언덕 너머로 보이는 불 역시 어렴풋하기만 하다. 모든 것을 태우고 난 뒤에는 연기만 남을 것이며, 그 연기마저 사라지고 말테니.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골뱅이를 먹기로 했었는데, 친구가 일이 생겨 다음을 기약했다. 꼬인 인생 같은 골뱅이에 이쑤시개를 꼽아 단 번에 뽑아내야 속이 시원할 텐데. 골뱅이와 소주가 간절했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혼자 청승떨 수는 없으니. 맞다.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게 어디 있었던가. 인생이 덧없다 한들 어찌하나. 그렇다고 인생이 없는 것은 아니니 그저 살아갈 수밖에.
+ 뻔하지만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인생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한 말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더 휠>은 연극적인 영화 혹은 연극이 되려는 영화였다. 조명의 대비적인 사용이나 배경(무대)의 한정, 점프컷 같은 씬의 전환, 배우의 대사를 독백으로 느껴지게끔 하는 클로즈업 샷 등. 그다지 특기할 만한 부분은 없지만, 이러한 연극적 연출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씬의 경계였다. 앞서 말했듯 배경을 연극 무대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씬이 점프컷처럼 전환되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는 완전히 다르지만, 공존할 수밖에 없으며, 어떻게 보면 닮아있기도 한 현실과 환상의 얕은 경계를 느끼게 하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또한 믹키라는 캐릭터는 모든 비극의 원인인 동시에, 유영화 속 모든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결국 모든 상황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미키의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믹키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환상을 표상하는 것이 아닐까.
+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콜린 퍼스의 우디 앨런과 작업하지 않겠다는 말이 기사화되면서 우디 앨런의 성추행 이슈가 다시 불거졌다. 아직 의혹에 머물러 있지만,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의 영화에 만족했던 만큼 인생무상을 느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