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Sarajevo
지난 1년간 감사한 기회를 통해 영국에서 석사 공부를 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네요. 공부를 하러 갔지만,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여행, 그 중에서도 논문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기 전 약 한달여의 기간 동안 어디를 여행할지였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1년 후의 여행을 내다보았으니 얼마나 절실했을가요. 영국에 가기 전부터 막연하게 모로코를 최우선 후보로 올려놓고 즐거운 생활을 보내던 중, 제가 살던 도시의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책 한권이 저를 발칸반도로 이끌었어요. 책의 제목은 <Unknown Yugoslavia>, 지금은 여러개의 나라로 흩어진 유고슬라비아 여행기를 담은 어느 프랑스 작가의 책이었죠. 일체의 감상을 배제한체 작가 자신이 방문했던 곳들을 소개하고 있으니, 여행가이드 책으로 보는게 더 적절하겠네요. 아무래도 냉전시절 프랑스 독자들에게는 낯설었을 동구권의 한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겠지요.
반세기 이상을 지나 영국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건 운명이었을까요. 구 유고슬라비아 중에서는 크로아티아만 가봤었기에 이번 기회에 구 유고슬리비아 국가들을 하나씩 방문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기숙사 마지막 거주일을 하루 앞둔 2023년 8월 30일, 논문을 미처 끝내지 못한 채 1주일 기한연장을 신청하고 정들었다는 말로는 부족한 캠퍼스에 작별을 고한 후 영국을 떠나 뮌헨으로 향했습니다. 올해를 끝으로 잠정 은퇴를 선언한 Adele의 마지막 콘서트를 보고, 감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새벽 2시에 출발하는 야간버스에 몸을 싣고 슬로베니아로 향하면서 발칸반도에 발을 들였습니다.
각 나라와 도시들의 선명한 잔상들이 제 머리 속에 깊이 박혀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발칸반도는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는데요. 역시나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와 도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입니다.
자그레브에서 가까스로 논문을 제출하고, 아쉬움과 허무함을 가득 안은 채 밤 11시 사라예보 행 야간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국경에서 내려 여권을 검사하고 다시 버스에 탑승하니 교환학생 시절 야간버스 또는 기차에서 밤을 지새던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보듬으며 잠을 청했고, 예상보다 1시간에나 빠른 새벽 5시에 사라예보에 도착했습니다.
사라예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 쪽이 저려오는 건, 역사의 상흔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도시의 기구한 운명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사 책에서 마주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현장인 라틴교는 오랜 세월의 흐름을 머금고 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수많은 하얀 비석들은 그저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었죠. 구시가지엔 관광객들과 상인들의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했지만 도시 곳곳에 스며든 현대사의 비극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죠. 초등학교 2~3학년 때 뉴스에서 보았던 내전의 참혹한 장면들이 저절로 떠올랐고, 아직도 피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은 뉴스화면 속 한 여자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가 융합되지 못하고 마지못해 하나의 영토에 속한 모습이었어요. 사라예보에서 약간만 외곽으로 나가도 세르세르비아어와 세르비아 국기가 거리를 수놓고, 아직도 이들 중 일부는 과거 세르비아가 자행한 참혹한 짓거리들을 옹호하고 있겠지요. 물론 서구에서 세르비아만 일방적으로 악마화시킨 것엔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적어도 보스니아에 있는 이상 이들을 책망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 비극의 현장은 멀리서 온 방문객에게 끝없는 호기심과 질문, 고민거리를 남겼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아직 그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영화 <웰컴 투 사라예보 (Welcome to Sarajevo)>를 감상했습니다. 1997년에 개봉했으니 보스니아 내전이 데이튼 협정에 의해 종결된 지 약 2년이 지난 후이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또 다른 비극인 코소보 전쟁이 발발하기 약 1년 전이었겠네요. 이 영화속에도 한 여자아이가 등장합니다.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든 전쟁의 상흔을 겪고 있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기자들이 전쟁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강렬한 이미지를 담아내는 데 치중한 가운데, 영국의 한 기자는 부모를 잃은 이 아이의 양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힘든 여정을 거친 끝에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참혹한 전쟁의 장면들은 잠시 잊은 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중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이의 엄마를 찾았고 아이가 사라예보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한마디. 아이에 대한 책임과 친부모의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던 기자는 다시 사라예보로 향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기자는 신부 옷을 입은 한 아이가 뛰어가는 뒷모습을 발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여자 아이의 양부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처럼, 기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아이를 뒤따라갑니다.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시민들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고 다다른 언덕 위에, 남루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고요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첼로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 말없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하고, 자신이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형상화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실례가 될 만큼 처절하고 숭고합니다. 소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첼리스트인 Vedran Slaimovic는 실존인물로, 사라예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음악을 통해 보스니아인들의 마음을 보듬었고, 그가 연주하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에는 거대한 슬픔 속 일말의 가느다란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라틴교 근처에 자리한 사라예보 시청사는 과거 국립도서관으로 이용되었지만 세르비아의 폭격으로 건물 대부분이 무너졌었다고 하는데요.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면 잿더미로 타버린 건물의 모습들과, 당시에 베드란이 연주했던 첼로가 전시되어 있어 그 당시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워낙 즉흥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제가 발칸반도를 여행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고서점의 책 한권이 저를 이 여정으로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물론 60년대의 책에는 유고슬라비아가 마주했던 비극은 찾아볼 수 없지만, 90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내며 뉴스를 통해 목격한 유고 내전의 참상은 제 머리 속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번 여정을 통해 눈 앞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잔혹한 전쟁과 폭력을 무기력하게 응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분히 서구사회가 주도하는 의도적인 방임이라고 보는게 더 적합하겠죠. 유고 내전 때처럼요. 우리는 언제쯤 진정한 자격을 갖춘 평화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https://youtu.be/vb6va1KXzHU?si=M4Gm_6MlFH8fcZw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