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원 No39] 예술人기획人행정人 부족 간 인터뷰 프로젝트
서른아홉 번째 좌표는 2023년도 최우수 문화도시로 선정된 부산 영도문화도시센터로 가보았습니다. 이곳 크루들의 일을 하는 방식은 조직문화를 연구하는 저에게도 상당한 인사이트를 줍니다. 특히 오늘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은 '영도문화도시'가 만들어내는 끈끈한 조직력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하는 핵심 크루입니다. 프로일잘러는 3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에 많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은 이 분야에 진입을 희망하거나 진입 초기에 있는 20대에게도 공부가 되지만, 5060 세대에게도 변화하는 일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동시대 문화기획자 중에서 30대 프로일잘러의 마인드셋과 고민, 일을 하는 방식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일독을 권해봅니다. 저에게도 많은 인사이트를 주었고, 영도가 왜!? 최우수 문화도시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비결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N개의 자기다움과 협업하는 영도의 문화기획자 한예리"
1. 이름은? 사회에서 연차는 어떻게 되시나요?
안녕하세요, 올해 9년 차 문화기획자 한예리입니다.
2. 어떤 일을 해 오셨나요. 일터(작업의 공간)에서 당신의 역할을 소개해주세요 & 역할 속에서 자신의 직업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현재 부산의 영도문화도시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2020년에 합류해서 지역의 다양한 창작자들이 영도를 탐색하고 리서치하는 프로젝트들을 담당했고요. 이후 봉래동 물양장을 중심으로 청년 문화기획자들의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물양장 컬렉션’을 진행했습니다.
재작년부터는 타 지역 청년 창작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 달 일하기 프로젝트 ‘내-일의 항해캠프’를 진행하고 있어요. 이밖에 전국 문화도시 박람회나 연결사회 지역거점 사업 등을 맡으며, 도시팀을 총괄하는 파트장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문화기획자라는 정체성을 잊은 적은 없어요. 제 일에 ‘협업-매개-소통’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 때마다 적성을 확인했고, 이 업을 선택한 이유와 하고 싶은 일이 어디까지나 저를 기획자로 설명하기 때문이에요.
다만, 문화도시를 경험 한 이전에 비해서 네트워크와 호기심이 확장되고, 문화도시가 추구하는 창의성을 이해하고, 제가 가진 강점과 일하는 방식이 계발됨에 따라 저의 인지적-사회적 바운더리가 부글거리니까, 정체성이 구체화된다는 느낌은 못 받은 것 같아요.
3. 한번 떠올려 주시겠어요. 당신이 하는(해 왔던) 일을 선택했던 내적인 욕구, 초심, 계기, 우연 등은 무엇이었나요.
지금까지 활동해 오면서 욕구의 변화는 3번 있었습니다. 1) 대학 졸업 후 예술가와 협업하고 싶다는 작은 욕구 + 일에 대한 가치관 + 나의 강점을 면밀하게 따져보고 전시기획자라는 직업을 선택했어요. 일 경험을 쌓기 위해 ‘일단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ON ART PROJECT(온아트프로젝트)라는 팀을 꾸려 광안리의 작은 카페에서 첫 전시를 열었습니다. 이후 부산문화재단 등에서 진행하는 문화기획자 양성사업에 참여하면서 문화예술 씬에 진입했고, 온아트프로젝트는 2년간 8번의 전시와 축제를 열었어요.
2) 저는 온아트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동시에 지역문화원과 공연기획사에서도 일했는데요, 문득 예술가와 기획자의 차이, 기획자의 오리지널리티, 기획자의 전문성 같은 것들에 질문이 생기면서 제 욕구와 정체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조금 더 구체화된 저의 흥미는 ‘공간기획’이었습니다. 공간기획 활동을 이어가면서 전문성을 높이고자 브랜드 홍보관을 조성하는 인테리어 회사에 입사했어요. 캐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저뿐이던 그곳에서 질문하는 힘, 영악한 사회성, 기초적인 안목을 길렀어요.
3) 코로나 직전 마지막 현장에서, 2층 규모의 홍보관이 무자비하게 철거되어 쓰레기더미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일을 계속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의 정체성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원점으로 돌아갔어요. 왜 일을 하려고 했는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다시 되짚으며 문화예술 씬으로 복귀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영도문화도시센터에 오게 되었어요.
4. 당신이 하는 일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고객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생각하시는 고객에게, 당신은 어떤 역할기대와 요구를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제 고객’은 저의 상급자입니다. 회사에 다닌다면 어디까지나 저의 상급자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제 역량에 비해 자아가 너무 강해서 힘들 때, 설득의 대상을 전환하고 일하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습득하는 편이에요. 특히 사회경험이 적었던 시절에는 비효율적인 처리방식이나 촌스러운 결과물을 마주할 때, 조직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야 할 때 유독 ‘조직의 일’과 ‘나의 일’을 구분 지었던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점점 주도성을 잃고 효과성보다는 생산성에 집중하게 돼서 안 좋았어요.
‘나’를 내려놓고, 시선을 당기고, 현상의 요인을 보려고 노력하면서 조직이 가진 정서, 체계, 전문성 면에서 보완할 점을 발견하거나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싶을 때는 저에게 부여된 권한 내에서 설득의 대상을 찾습니다. 조직 구성원의 합의와 상급자의 지시 안에서 능동적으로 행동할 기회를 얻는 거죠. 이와 연장선에서 업무 자체는 기존의 방식을 최대한 따르는 편이에요. 현상의 요인을 파악하는 데 효과적이고, 최소한의 아웃풋은 보장되면서 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조직에 나를 동화하고 싶지 않을 때는 스스로 로봇이라고 생각하고 일합니다.) 동료에게서 들었는데 저는 의외로 조직 순응형 인간이라 하더라고요. 저는 지금 창의적인 조직 순응형 인간이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
본의 아니게 한 곳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다 보니, 현재 심적으로 많이 흑화 되어 있어서, 고객으로부터 어떤 역할을 요구받는지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요약하자면 1) 조직 내 갈등관리, 2) 경우에 따른 위기대응, 3) 투자 대비 대폭 성장 정도인 것 같아요. 3) 번을 부연하자면 문화도시 사업의 실무자로 일하면서 얻는 것이 많은데, 그만큼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성장 폭은 저의 고객이 기대하는 것에는 늘 못 미칩니다. ★
‘제 일의 고객’은 영도라는 도시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저희 센터의 모든 사업이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이야기합니다. 각각의 사업들은 도시가 품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 사람들이 일으키는 현상들, 도시 내ㆍ외부의 보이지 않는 관계망들이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역할을 찾는 것 같아요.
5. 당신이 하는(해왔던) 일의 시퀀스('기-승-전-결')는 보통 어떤 흐름으로 이루어지나요?
제가 현재 하는 일은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봐요. 저희 센터의 신규사업의 경우 주요 도시문제를 중심으로 지역적 특성과 주민의 요구 등이 담당 크루를 통해서 재맥락화되고, 조직 차원에서 사업화됩니다. 신규사업이 아닌 경우에는 전년도 사업을 내부적으로 평가하는데, 주로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회고하며 추후 사업에 반영할 요소를 도출하는 식입니다.
크루들은 이렇게 사업을 기획할 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반영시키게 되고,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파트너를 찾아요. 이후부터는 주로 현장에 나가거나 참여자 또는 협력자와 소통하며 각자 일하는 방식을 가다듬어 갑니다. 사업이 종료되면 중앙부처에서 제시하는 지표를 기준으로 사업의 결과를 해석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6. 일의 과정에서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혹은 '요구받는 가치'는 무엇이 있나요?
‘자기다움’인 것 같아요. n개의 자기다움이 맞부딪히며 발현되는 창발성과 창의성이 제 일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사업의 과정과 조직문화 전반에서 자신의 관점과 경험, 정체성을 정의해 볼 것을 권유해요. 자기다움이 견고해질수록 사업에 당사자성이 생기고, 과정에서 주도성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7. (최근 3년 동안) 당신이 특히 해결해보고 싶었던 문제(과제)는 무엇이었나요, (문제) 과제를 만났을 때, 진입장벽 혹은 페인포인트(그동안 해소하지 못한 불편함, 어려움 등)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풀어보려고 접근하셨나요
저희 팀이 일하는 방식이었어요. 재작년부터 파트장 역할을 맡으면서 실험정신이 생기더라고요. 일단 팀 구성원이 동일하게 겪는 문제가 있었어요. 1) 보상에 비해 업무량이 많은 것 2) 경험치에 비해 업무 난도가 높은 것 3)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가 추상적인 것. 이 문제로부터 오는 심신의 악화를 더디게 하고자 저희 팀이 일하는 방식 안에서 몇 가지 시도를 했어요.
첫 번째는 ‘업무 공유의 간소화’입니다. 센터는 하나의 단위사업을 한 명의 크루가 맡아요. 그래서 파트장을 제외한 팀 구성원이 업무협의를 할 상황이 잘 없습니다. 노션을 통해 주간 업무계획과 진행 여부를 함께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팀 차원의 주간회의를 없앴어요. 이후에도 대부분의 업무 공유를 함께 편집할 수 있는 플랫폼에서 하고, 논의된 결과를 즉시 반영하는 식으로 개인의 시간을 확보합니다.
두 번째는 ‘팀 스터디 활성화’입니다. 사업을 설계하는 시기에는 자신의 사업만 고민하느라 정신적으로 고립돼요. 팀원 서로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료로서 역할하는 것이 팀 스터디입니다. 각자 사업에 대한 데이터와 생각을 정리하면서 동료들과 나누고 싶은 문제를 설정해요. 스터디에서는 정답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환기하고, 서로의 관점을 빌려 사고를 확장하고, 문제의 해답을 찾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회고하는 연습’입니다. 사업의 효과와 가치가 긍정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지만, 성과지표에 담기지 않는 것들까지 체감하고 인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사업 종료 후에 갖는 팀 차원의 회고 시간은 일을 통해서 얻은 성취를 객관화하는 작업이에요. 사업의 과정과 결과를 돌아보며, 동료 간의 강점을 재확인하고, 사업의 연결점을 발견하고, 다음을 위한 전략을 세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업무의 효율화-공론화-객관화를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설계하고 실험해 보았던 것 같아요. 이 세 가지 방식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이제는 생산성 있는 휴식과 가속도 붙은 대화를 하며 동료의 업무에 대한 공감력도 꽤 높아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문제의 원인은 따로 있기 때문에, 새로운 요구와 방식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흥미로워요.
8. (최근 3년 동안) 당신이 기억나는 '보람의 순간'이 있었다면
대학원을 휴학하지 않은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재작년부터 문화예술경영 석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업무와 학업에 물리적 시간을 너무 많이 쏟게 되어 그동안 매 학기 휴학을 고민했었고, 휴학을 종용하는 리더와 휴학을 만류하는 교수님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드디어 마지막 학기를 맞이했습니다. 대학원 진학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있었지만, 문화도시 사업을 하게 되면서 확고하게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아요. 특히 문화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문화예술의 스펙트럼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싶었는데, 실제로 매년 담당하게 되는 사업과 연관된 수업을 들으면서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어요. 논문과정을 거쳤다면 한 가지를 깊게 탐구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습니다. 전 세계에서 함께 공부하는 원우님들과 늘 응원해 주시는 교수님들을 본받아서 앞으로는 건강하고 진득하게 공부해보고 싶어요. 경희사이버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파이팅♥ ★
9. 당신이 가진 내적인 힘들 가운데, 어떤 힘이 강하신 것 같나요(장점, 나다운 것 등)?
강점혁명의 언어를 빌려서 ‘개별화(Individualization)’를 할 수 있는 힘!? 예전에 강점혁명 테스트를 한 적이 있어요. 갤럽에서 개발한 강점 진단 도구로써 사람의 재능을 34개의 테마로 구분하는데요. 검사 당시에도 상위 5개 테마에 들어있었던, 그리고 최근 가장 많이 발휘하는 것이 ‘개별화’ 예요. 개별화 테마가 강한 사람들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성에 흥미를 느끼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협력해서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데 탁월하다고 해요.
삶의 서사에 호기심이 있는 저의 성향과 다양한 사람과 협업하는 저의 일이 어떤 시대정신 안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저의 강점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현재 조직의 핵심가치와 맞닿아 꾸준히 계발되어 온 부분이고, 근래에 포스트 문화도시에 대한 조직적 대안을 함께 고민할 기회가 돼서 아주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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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었던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혹은 저자, 작가 등을 소개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직 제대로 이해를 못 한 책인데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와타나베 이타루 저.)」에 착취하지 않는, 이윤을 남기지 않는 경영형태가 나옵니다.
저는 당연하게도 제 노동력은 상품이고, 일 경험을 쌓는 것이 제 노동력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전두엽이 흔들렸던 기억이 나서 소개합니다. 공동체, 공존, 다양성을 표방하는 문화예술 현장에서 최저가로 일을 시작한 노동자로서 좀 더 본질에 가까운 일과 대안적인 노동환경을 꿈꾸며.
11. 앞으로 어떤 일(작업, 역할)을 하고 싶나요? 그것을 위해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싶) 나요?
여전히 경험해보고 싶은 영역과 강화하고 싶은 역량이 많아서 하나로 특정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지금처럼 좋은 동료들과 함께 문화기획자로서 고민하고, 연결하고, 실험하는 일을 할 거예요!
12. 당신을 좀 더 알 수 있는 소셜미디어/사이트/뉴스를 알려주세요.
▷ 저의 흑화 된 최신 감성이 궁금하시다면 인스타그램 @yerihan
(개인적으로 소셜미디어를 감정 바구니로 사용한다는 점을 알아주시길 바라며)
▷ 온아트프로젝트의 옛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인스타그램 @on_art_project
▷ 영도문화도시센터의 고군분투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인스타그램 @ydartcity
N개의 자기다움과 협업하는 영도의 문화기획자 한예리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