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번째 좌표도 춘천으로 가보았습니다. No43, N45, N46은 춘천 구간입니다. 춘천 문화도시 사업을 담당하는 직원 대상으로 2022-2023년 조직문화 진단을 2년 연속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설문 문항에 이런 질문을 담았습니다. "작년 한 해, 나의 성장에 기여한 사람을 모두 얘기해 주세요?" 1개 본부 4개 팀 대상이었습니다. 보통 우리 조직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나를 얘기하는 사람은 몇 퍼센트나 될까요?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1명당 10% 이상의 답변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소개드리고 싶은 분은 50%가 넘는 직원이 '나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는 응답을 했었습니다. 당시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올 수 있지? 하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이분이 춘천 문화도시박람회 사업의 총괄을 담당했습니다. 어떤 조직의 조직문화가 좋다고 하면, 그 이면에는 '팀 DNA'와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다정한 중간 매개자'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역량도 좋은데, 품도 넓은 사람입니다. 이 분은 기획자라는 수식어보다는 리더, 좋은 리딩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앞으로 '문화예술계의 거목(巨木)'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좋은 문화기획자가 되고 싶거나, 문화재단을 꿈꾸며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와 품성이 필요한지 궁금한 분들이 있다면, 이 인터뷰를 꼭 한번 권해봅니다. 지금은 업계에서 텍스트북으로 삼을 수 있지만, 어쩌면 바이블이 될 것도 같습니다.
차세대 문화예술 기획자의 텍스트북
다정한 리더 최수현
1. 이름은? 사회에서 연차는 어떻게 되나요?
최수현입니다. 학교 생활과 프리랜서 생활을 꽤 오래 겸했어요. 글쓰기 선생님으로 8년, 프리랜서 영한 자막 감수자로 5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의 예술강사로 5년여를 활동했습니다. 이후 2018년 6월 춘천문화재단에 입사했어요. 입사부터를 본격적인 사회생활로 친다면, 6년을 막 채우고 7년차를 향해 갑니다.
2. 어떤 일을 해 오셨나요. 일터(작업공간)에서 당신의 역할을 소개해주세요 & 역할 속에서 자신의 직업정체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전공하고, 글쓰기와 국어 입시 과외부터 예술강사, 콘텐츠 감수까지 글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경험이 된다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흥미가 있었어요.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일도 물론 보람 있었지만,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법을 관찰하며 많은 영감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문예지에 작품을 투고해 신인상 최종심까지 올라 보는 행운도 있었지만, 등단을 하지는 못했어요. 대학원에 진학하고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경험, 생활과 현실의 벽 앞에서 삶의 방향성과 지향점이 바뀌는 큰 사건들이 전환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예술강사 시절
춘천문화재단 입사 면접에서, 마지막으로 더 할 말이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어요. “제가 오늘 말을 참 못 했는데요, 사실 저는 글 하나는 정말 잘 쓰거든요. 춘천에 오게 된다면 제 능력을 잘 활용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진심이 느껴졌다고.) 그렇게 춘천문화재단의 홍보, 언론사 커뮤니케이션, 채널 관리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매거진 POT의 기획과 제작, 춘천시민 아카이빙 인터뷰집 <Spring 100, Spring!>의 운영 지원, 문화도시 브랜딩 커뮤니케이션 전략 수립, 브랜딩 아카데미 운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프로젝트처럼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한 전문 분야 안에서 전문가들과 호흡을 맞추며 일했어요. 퀄리티 측면에서 적극적인 백업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획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레퍼런스를 공유하고, 잡지의 한 꼭지를 직접 쓰거나, 교정을 보는 일 등 자신감 있게 관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지역의 가치를 재해석하고 사람을 발굴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간행물들
재단에 입사해 꿈의 오케스트라, 청년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크고작은 라운드테이블과 아카데미처럼 관심분야 외에도 다양한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것이 좋았어요. 그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추진 과정을 예비 때부터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작년 하반기에는 도시문화브랜딩팀을 이끌며 계절마다 축제를 했어요. <물 만난 춘천>, <석사천 재즈 페스타>, <춘베리아 특급열차>, <봄식당>을 함께했고, 올해 상반기에는 <문화도시 박람회>의 총괄 담당자로 일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스케일이 큰 사업들을 하면서 ‘좋은 협업’과 파트너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느끼게 되었어요. 안팎의 마음 맞는 동료들 덕분인데요. 좋은 동료들과 일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지만 스스로 ‘행정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행정과 규정에 대한 이해는 사업 이전에 공공성과 보편성을 갖추기 위해 당연히 체득해야 하는 기본기라고 생각합니다. 공공이기 때문에 더욱 전문성과 창의력,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같은 사업이라도 매년 반복되는 관성을 깨고 새로운 일로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별나고 유난스럽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그래서 지금으로선 저 스스로가 공공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3. 한번 떠올려 주시겠어요. 당신이 하는(해 왔던) 일을 선택했던 내적인 욕구, 초심, 계기, 우연 등은 무엇이었나요
나로부터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이 어릴 적부터 있었어요. 크고 대단한 변화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개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 공공이 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사명감 같은 거요. 좋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지향점이 있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좀더 체계적인 시스템과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싶어 공공의 문화재단에 지원하게 되었어요.
지역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입사 이후예요.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문화도시 사업을 하며 깨닫게 되었죠. 춘천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지금은 태어나고 자란 곳보다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어요. 삶의 리듬이 춘천과 잘 맞아요. 수도권에 살면서는 인지하지 못했던 지역 고유의 특성과 자원에 대해 고민하고 배워가는 감각이 정말 좋아요.
사무실 아르숲 생활
4. 당신이 하는 일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고객은 누구인가요
저는 동료들을 위해 일합니다. 그간 제가 맡아온 업무의 대부분은 동료들이 맡은 일을 더 잘 해내게 돕고, 더 잘 보여지게끔 여러 가지 방면으로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당자로서, 상급자로서 제안/제공하는 서비스와 콘텐츠, 시스템이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가장 민감하게 체크합니다.
그 다음은 춘천문화재단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받는 시민들입니다. 간결하고 단순하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고,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메시지와 이미지, 참여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설계합니다.
4-1. 당신이 생각하시는 곡개에게, 당신은 어떤 역할기대와 요구를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동료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한 기대와 책임이 있다고 느껴요. 업무분장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도 저의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홍보 담당자 시절부터 이어온 습성인데, 사업이 무엇이든간에, 오늘 동료들이 어떤 업무를 하는지 다른 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회의가 있는지 함께 도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야 각자의 장점과 약점을 알고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으니까요.
점심시간 합주회 (딱 한번 하고 해체됨)
최근 문화도시 박람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는 함께 일하는 28개 도시의 문화도시 실무자들로 범위를 넓혀 조금 더 쾌적하게 일할 있도록 운영 원칙을 제안해 보기도 했어요. 이런 선언이 실제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마음이 덜 다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과정 자체가 큰 의미를 남겼다고 생각해요.
시민들은 공공 서비스 안에서 본인이 참여했을 때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점이 좋고 매력적인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공공 서비스에서 UI/UX 디자인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정보는 접근성을 최우선해야 하는데, 사업에 몰입하다 보면 ‘내가 아는 것을 시민들에게도 알려줘야 한다‘는 감각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더 많은 사람들의 반응과 인지를 촉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혼자 해결할 수 없어요. 그래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발신되는 메시지의 정보 전달성은 물론 퀄리티와 미감을 브랜딩 체계 안에서 관리하는 부분도 저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5. 당신이 하는(해왔던) 일의 시퀀스(기승전결)은 보통 어떤 흐름으로 이루어지는가?
저에게 주어진 과제가 어떤 정책과 계획에 의해 흘러왔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정책을 만든 이들이 어떤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어떤 방향을 제시했는지, 다른 기관/기업/프로젝트들은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게 최선일까에 대해 의심해 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관성이나 관습에 의해 하는 건 아닌지, 절차나 규정에 막혀 외면해 왔던 사각지대는 없는지 꼭 다시 한번 부딪쳐 봐요. 같은 문제, 규격화된 사업과 목표라고 해도 더 나은 성과로 끌어가려면 어디까지 새롭게 시도해 볼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고 체화합니다.
만들고 뿌리고 버리고 포스터
그 다음에는 이 사업을 통해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과 도달하고 싶은 목표의 최대 상상치를 설명해 봅니다. 두서 없을 때도 많습니다. 가장 첫 번째로 발신될 포스터 이미지나 메시지를 상상해 본다든지, 행사의 마지막 장면을 예상해 본다든지 하는 식입니다. 좋은 시야와 시선을 가진 동료들과 나누고 각자의 문제의식을 듣습니다. 행정의 틀 안에서 꼭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있잖아요. 이 과정을 거치면 제가 구상한 것들 안에서 놓친 것들이 보입니다. 무모했던 부분들을 시인하고, 포기하고, 가능한 것들과 불가능한 것들을 구분하고, 사업의 방법을 현실화/구체화합니다.
문화도시 춘천 브랜딩 라운드테이블 만들고, 뿌리고, 버리고
이제 설득의 과정입니다.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합니다. 기왕이면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존중해 업무를 나누되 개인에게 성장의 기회가 되거나 변화의 기점과 만나 시너지가 날 수 있을지도 가늠해 봅니다.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개개인의 마음을 읽어 주고, 각자가 어떤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지를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최대한 디테일하고 구체적으로 일을 나눕니다. (몇 번의 착오를 통해 이 과정을 대충 했을 때 후에 얼마나 큰 혼란이 닥치는지를 몸소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일이 생겨나면 또 나눕니다. 쩨쩨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나눠야 합니다.
그러고나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주 디테일하거나 하찮거나 개인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런 부스러기들을 나서서 정리합니다.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풀어 주고, 상급자나 상위 기관과 소통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동하는 부분이 어디일지 긴밀하게 살펴보고 메시지를 가공/발신합니다. 메시지와 현장이 잘 연결되도록 퀄리티를 컨트롤합니다.
문화도시센터 사업설명회
마지막은 후회 없이 응원하고 칭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함께 일한 동료와 파트너들이 무엇을 잘했고 얼마나 마음을 보탰는지 정성껏 나눕니다. 기왕이면 다음의 스텝을 함께 꿈꾸고, 응원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부족했던 점이나 부정적인 피드백은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서로 적어 전달하거나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6. 일의 과정에서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혹은 '요구받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첫째,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새로이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게 있는가? 입니다.
둘째, 다정한 마음, 선한 마음이 작동해야 합니다. 혹자는 너무 순진하다고도 하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대부분이 그런 가치를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야 연대가 작동하고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셋째, 문제의식입니다. ‘그냥’ 하는 사업은 없잖아요. 특히 사업 이전에 스스로 사회의 문제를 탐색하고 진단하고 발견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 당신이 특히 해결해보고 싶었던 문제(과제)는 무엇이었나요. 과제를 만났을 때 진입장벽 혹은 페인포인트(해소하지 못한 불편함, 어려움 등)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풀어보려고 접근했나요?
코로나 이전에는 공공에서의 홍보와 채널 관리가 지금처럼 사업화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채널은 운영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자체 콘텐츠 제작과 발신을 하는 곳은 많지 않았고,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예산 편성의 우선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산이 아예 없거나 아주 적은 경우도 대다수였고요. 주로 조직의 막내들이 (가장 젊으니 가장 트렌디하다는 이유로) 떠맞듯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입사 후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은 적도 없었고, 매뉴얼도 없이 혼자서 문서와 자료를 찾아 가며 주먹구구로 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 불만이 아주 많았어요. 그러면서 잘되면 사업 잘한 덕분이고, 못 되면 홍보 못 한 탓이고?
다른 기관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춘천 중간지원조직 홍보담당자 라운드테이블 <춘천의 홍보 담당자는 고개를 들어주세요>를 기획했습니다. 한자리에 모여 같이 고충을 나누고, 조직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궁금증을 해결했어요. 질문 중에는 아주 사소하고 깐깐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 번씩 좋아요 눌러 주면 담당자 체면은 차릴 수 있다'이라며 나름의 연대도 했고요.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저는 그때 오셨던 분들과 아직도 연결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변화와 위기를 겪으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든든합니다.
홍보담당자 협의체
굿즈 라운드테이블 <만들고 뿌리고 버리고>도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기획이었어요. 이 역시도 전국 각지에서 의외로 많은 실무자가 춘천을 찾아오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 저의 과제는 “전국 문화도시 박람회”였습니다. 1회 청주, 2회 서귀포, 3회 영도까지 문화도시 박람회에 참가하며 저도 모르게 ‘춘천에서 박람회를 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 그리고 ‘왠지 내가 맡게 될 것만 같다’는 예감을 하고 있었거든요. 일하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타입입니다. 굉장히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성향 때문이에요. 너무 작은 것들을 신경쓰느라 큰 그림을 놓칠 때도 많았어요. 완벽하고는 싶지만 두서가 없거든요. 큰 흐름 안에서 닥쳐오는 일들을 그때그때 해결하고, 관심을 쏟고 싶은 부분에 지나치게 몰입하곤 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팀에서 함께 맡게 된 축제 사업들도 그렇고, 문화도시 박람회도 그렇고, 물리적으로 혼자서 통제 자체가 불가능한 사업구조 안에서 부침을 겪었지요. 체계와 시스템과 합의 없이 제 머릿속에 있는 대로 해치우는 방식으로는 절대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통제에 대한 압박감이 강제로 깨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뇌었어요. ‘세상에 완벽한 행사는 없다. 하지만 망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넘겨짚지 말자.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이유가 있다…’ 그러자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표정이 보이고 각자의 강점과 이루고 싶은 욕망들이 보였어요. 그것들을 존중하며 일하기 시작했더니 혼자 할 수 없는 일도 같이 하면 해낼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하고 쉬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조금 바보 같나요? 온몸으로 부딪치고 깨지며 배운 소중한 경험입니다.
8. (최근 3년간) 당신이 기억나는 보람의 순간이 있었다면?
상반기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 준비했던 문화도시 박람회를 마무리하고, 다같이 모여서 사진 찍었을 때. 철수 중에 동료들과 함께 본 무지개.
우리가 만든 매거진, 자료집, 기록집이 인쇄되어 책으로 배달되어 만나는 매순간.
최근 지역 출판사와 함께 국제도서전에 나갔어요. 그동안 협업한 매거진과 출판물을 들고 나가 세팅을 마쳤을 때. 저는 주말 도우미 역할로 참여했지만, 춘천의 콘텐츠를 보고 반응하는 사람들과, 자랑스러워하는 춘천 사람들을 보았을 때에도 보람찼습니다.
국제도서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사업 안에서 위기와 과정 끝에 ‘성장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9. 당신이 가진 내적인 힘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강한 것 같나요?
복잡하고 어려운 무엇을 단순하게 만드는 힘. 프로젝트도,콘텐츠도, 인간관계도… 단순해야 일을 하잖아요. (제일 자주 하는 말 : 그냥 뚝딱 해 버려요, 이번주까지 결과보고 부순다.)
잔잔한 수면에 돌 던지는 힘과 돌 맞는 맷집. 그냥 하는 법이 절대 없고, 당연한 것들을 질문하고, 남들이 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꼭 직접 부딪치고 두들겨 봐야 알거든요. 규칙이 나를 막으면 규칙을 바꿀 기세로, 하지만 그 규칙이 타당하다면 빨리 인정하고 사과하고 순응하기…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꺾이지 않는 마음.
사무실 공사중, 비닐 가벽 앞에서
10.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었던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혹은 저자, 작가 등을 소개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새로운 공간과 환경과 문화를 맞닥뜨리는 순간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익숙한 일들만 반복할 땐 우울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책과 영화, 시리즈물을 보는 일도 같은 맥락에서 모르는 문화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어 꾸준히 좋아합니다.
한결같은 선의와 친절과 그동안 쌓아온 실력이 빛을 발하는 이야기, 대책 없는 오합지졸들이 다같이 힘을 합쳐서 탁월한 무언가를 해내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변화와 성장을 겪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리틀 미스 선샤인, 레이디 버드, 스윙 걸즈, 다즐링 주식회사, 웡카 같은 영화들요. 해리 포터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고요.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힘을 깨닫고 “Show yourself“를 노래하며 새로 태어나는 겨울왕국2의 엘사 이야기도 좋아해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인생의 지침서로 삼고 있어요. 작은 일로부터 실천하는 대의와 변화, 진정성과 겸손함, 우직함과 자연에 대한 충성심을 배운 책입니다. 내 삶의 기획과 방향을 잃을 때마다 펼쳐봅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영향을 받았던 것은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예요.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냐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다정한 책입니다. 그를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근거들이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굉장히 묘하게 위안이 돼요. 일의 진도가 잘 안 나가고 계획서를 쓰다가 막힐 땐 시집을 펼쳐 봅니다. 사무실에 서너 권씩은 꼭 갖다놓습니다. (원하는 답을 얻어본 적은 없지만 하여간 무언가를 얻게 됩니다.)
11. 앞으로 어떤 일(작업, 역할)을 하고 싶나요? 그것을 위해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싶)나요?
이미지와 텍스트로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꾸준히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저의 무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요즘은 다양한 콘텐츠가 범람하고, 트렌드가 수시로 바뀌다 보니 그것들을 분별하는 리터러시가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더 넓은 시야, 더 전문적인 방법으로 디자인 언어를 배우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더 탁월하게 지역이 가진 고유의 특성과 매력을 조명하고 발굴하고 싶어요. 춘천뿐 아니라 다른 지역들도요.
한국을 넘어 다른 세계의 기획과 콘텐츠, 로컬리티에도 큰 관심이 있습니다. 지역, 기관, 전문가, 축제와 문화를 연결하는 국제 교류의 영역에서는 도전해 볼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지 탐색하고 있어요.
연차가 쌓여갈수록, 지역의 문화의 변화나 흐름에 대해, 일과 사회에 대해, 때로는 옳지 못한 상황에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느껴요. 삶을 기록하고 관찰하는 것도 좋지만,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비평하는 일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렷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변화를 이끄는 똑똑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배워야겠지요.
저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장, 내가 가진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무대, 새로운 시도를 하고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도전할 거예요. (공공이 아닌 곳에서 공공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궁금증도 항상 품고 있습니다.)
12. 당신을 좀 더 알 수 있는 소셜미디어/사이트/뉴스를 알려주세요
일하며 느끼고 배우는 것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의 이면들을 주로 포스팅합니다. 나이도 직업도 상관 없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 좋아요. 주저 말고 저와 친구가 되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