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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Like Song Jun 29. 2022

2년의 약속

흔들리며 피는 꽃

 내 책상 한편에는 표지가 다 떨어져 나간 수첩이 하나 꽂혀있다. 남아있는 뒷부분 표지에는 7사단 수색대대 O중대 O소대 송재민. 이라는 주기가 되어있고, '군복 수령시 사이즈 주의', '두 번 이상 생각하고 말하기'와 같은 훈련병의 다짐들 일부가 적혀있다. 수첩 안에는 입대 직전 떠났던 순례길 여행의 사진이 출력되어 있다. 그와 동시에 훈련소와 자대에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메모한 여행 에피소드가 보인다. 맨 앞으로 넘어와 뜯어진 표지 뒤쪽을 본다. 도종환 시인의 시구가 쓰여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입영 일자 탓에 첫 해외여행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스스로에게 몇 가지 약속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이런 것이었다.


순례길 여행을 잊기 전에 틈틈이 기록으로 남겨 책으로 남긴다. 


 수첩은 그 준비였다. 훈련소에 머무르는 시간이 5주인데, 그동안 여행 사진을 볼 수 없으니 영어 단어장처럼 여행 기억장을 만들어간 것이다. 남자들이 ‘건빵주머니’라고 부르는, 전투복 바지 단추 달린 주머니에 쏙 넣어서 숨길 수 있는 크기였다. 두발규정부터 대학교 학생회비까지, 집단의 규범과 관습에 대항하지 않던 내가 시도한 최초의 일탈이었다. 사격장에서, 행군하다가, 언제든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수첩을 꺼내서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메모했다. 한 번은 조교에게 발각되어 수첩을 뺏길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다른 훈련병들처럼 사진만 흥미롭게 둘러보고 수첩을 곧장 되돌려주었다. 여자친구 사진도 아니니 쓸데없는(?) 짓을 할 염려도 없고, 군대에 대한 반감이나 욕설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묵인해준 상급자는 그 조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자대의 선임들은 글쓰기를 사치스러운 취미로 여겼다. 이등병이란 항상 긴장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존재여야 하는데, 몸이 덜 힘드니까 쉬는 시간에 글쓰기 같은 것을 한다는 이유였다. 다양한 일화가 있지만 점심시간에 글쓰기를 통제하고 낮잠을 강요당한 게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낮잠을 자는 것은 전투력을 보존하는 일이고, 글쓰기는 부족한 체력을 취미활동에 사용하는 불성실한 짓이라고 했다. 실제로 야간 위병소 근무 때 조는 일이 있자, 낮잠을 아껴서 그렇다며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체력이 뒤떨어지는 것도, 특공무술 동작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모두 쉬는 시간에 글쓰기를 한 게 잘못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폭언과 폭력보다 더욱 슬펐던 것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독은 오히려 나를 더욱 악에 받치고 매달리게 했다. 저 김수영 시인의 시처럼, 독(毒)을 품고 나아갔다. 다양한 감정이 섞인 독이었다. 그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 군대와 정반대였던 여행에 대한 향수,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나를 긍정하는 수단, 그리고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글쓰기를 걸고 넘어간 선임들에 대한 복수. 특히 그 복수를 하려면 글쓰기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어쩌면 양쪽이 서로의 동기가 된 셈이다.

  또 하나 나를 지탱해준 것은 아버지의 헌신이었다. 100페이지 정도 되는 노트에 여행기를 빽빽이 써서 집으로 보내면, 아버지가 컴퓨터로 글을 옮겨 적은 뒤 다시 부대로 보내주었다. 그럼 내가 볼펜으로 다시 한번 내용 교정을 보는 식이다. 그렇게 옮긴 노트가 7권이니 못해도 700페이지에 달하는 손글씨를 한글 파일로 옮기신 것이다. 휴가 때는 함께 있으면서 내가 고른 여행 사진을 글에 배치하는 편집 작업을 했다. 고된 작업이었으나, 내가 평생 본 모습 중 가장 의욕적이고 정력적인 모습이었다. 선임들이 모두 떠난 마지막 6개월 동안은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원동력이 되었다. 


 전역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있었을 때, 아버지가 최종편집을 마친 책을 부대로 보내주었다.  이미 열 번을 넘게 다시 읽은 문장들이 일종의 문양처럼 느껴졌다.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기보다, 문양이 새겨진 도자기를 만지는 것 같았다. 병영도서관에 내려갔다. 전입 첫날부터 이등병이 도서관에 간다며 별종 취급을 받은 곳이었다. 부대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다. 서가에 책을 깊숙하게 밀어넣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 우리 부대에 온다면, 그래서 도서관에서 고독한 밤을 보내게 된다면, 그 때 우연히 눈에 띄길 바랐다. 


 출판은 전역일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약속은 기어코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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