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시게, 안녕히
작년 5월 봄이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스승님과 서원 뜰 정원에서 곧 출간을 앞두고 있는 괴테의 극작품 중 하나인 이피게니에의 번역 윤문 작업을 도와드리고 있었다. 독일 고전주의의 상징이라는 이 작품은 처음엔 나에게 너무도 낯설고, 머나먼 언어처럼 느껴졌다. 문장은 길고 운율은 익숙지 않았으며,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인물들의 관계는 복잡하고 낯설었다. 그러나 스승님은 단 하나의 장면, 단 하나의 말에서 이 작품의 심장을 짚어주셨다. 바로 그 대사였다. 극의 마지막, 국왕은 마침내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트, 필라데스를 놓아주며 말한다.
“Lebe wohl.”
“잘 살아.”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작별이 아니었다. 독일어로는 흔히 쓰이는 ‘또 봐요(Auf Wiedersehen)’가 아니라, ‘잘 살아(Lebe wohl)’라는 깊고 무거운 작별이다. 이 말에는 조건도 미련도 없다. 떠나보내는 자의 온전한 수긍과 남아 있는 자의 성숙한 체념이 담긴, 완성된 말이다. 괴테는 작품 전체를 통해 이 한 마디의 타당성을 준비해 왔다. 모든 갈등은 그 말을 가능케 하는 여정이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단지 희곡이 아니라, 말이라는 행위가 갖는 궁극의 윤리성과 구원을 증명하는 서사가 된다.
당시의 나는 그 인사를 그저 작별의 말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수십 번 되새기고 곱씹은 끝에야 이해했다. 진심 어린 한마디란,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 중 하나라는 것을. 그중 국왕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대사를 어떻게 옮길지를 두고 고민하던 날, 나는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 ‘안녕히 잘 가시게’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것은 너무도 평범한 인사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정서와 품격, 말의 결은 괴테의 한마디와 가장 닿아 있었다. ‘잘 가시게’라는 말에는 상대를 존중하는 낮고도 단단한 어조가 있고, ‘안녕히’라는 말에는 그의 삶 이후까지도 빌어주는 깊은 마음이 있다. 단지 작별이 아니라, 한 생 전체에 대한 축복이자 수긍이었다.
괴테는 이피게니에라는 인물을 통해, ‘말’이 가지는 윤리적 힘을 보여준다. 전쟁과 복수, 저주와 피의 계보 속에서, 그 끔찍한 굴레를 끊어낸 결정적인 순간은 폭력도 설득도 아닌, 단 하나의 말이었다. 그 말은 절규도, 복수도, 타협도 아닌, 살아온 삶 전체로 말하는 고요하고 단단한 언어였다.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복수하지 않는 말. 오직 인간의 가능성을 믿으며 건넨, 존엄한 한 마디. 그것이 결국 운명을 바꿨다.
스승님은 한동안 눈을 감고 그 말을 곱씹으셨다.
“안녕히… 잘 가시게…”
그러고는 조용히 미소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말 너무 좋은데요. 제가 몇 년을 고민했던 문장장인데 이렇게 좋은 제안을 해줘서 고마워요.”
그때 나는 알았다. 말은 기술이나 이론으로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임을. 교수님은 단어 하나를 오래 품고, 숙성시키며, 어느 순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조용히 마음을 얹는 분이셨다.
“안녕히 잘 가시게.”
그 말의 어감과 깊이는 마치 스승님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단어 하나를 수십 년 품고, 숙고하고, 무르익혀 내놓는 그 시간. 언어는 단지 소리나 의미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건넬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긴 침묵과 세월이 쌓여서야 도달할 수 있는 진심. 스승님은 그런 말을 아는 분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말을 한다. 그러나 그중 얼마나 많은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까. 스치듯 던진 말이 아니라, 온 생을 통과해 건네는 말. 사람과 사람을 끊는 것도 말이고, 다시 잇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진짜로 이어지기 위해선, 말보다 먼저 삶이 준비되어야 한다.
나는 종종 스승님의 손길을 떠올린다. ‘사소한 일’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다듬는 마음. 하나의 문장을 번역하기 위해 수십 년을 걸어온 그 품. 그 속에서 내가 배운 것은 단지 독일 문학이 아니라, 인생이란 결국 ‘작은 일을 위대하게 해내는 일’이라는 진실이었다.
이피게니에가 말한 “Lebe wohl”처럼, 우리가 함께 찾은 “잘 가시게”처럼. 어쩌면 우리 인생은, 그 단어 하나를 진심으로 내놓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말은 여정의 끝에 맺히는 진주와 같고, 인생은 그 말을 품기 위한 길고도 조용한 여정이다.
괴테의 『이피게니에』는 더없이 잔혹한 신화의 세계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 어머니를 죽인 아들, 그리고 그 모든 저주의 굴레 속에서 남겨진 한 사람, 이피게니에. 탄탈루스 가문의 어둠과 피의 역사는 인간 욕망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괴테는 이 심연의 무대를 단 한 사람의 고결한 인격으로 정화해 낸다. 더는 누구도 죽지 않고, 복수하지 않으며, 오직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떠나보낼 수 있는 결말. 그것을 가능케 한 힘은 다름 아닌 ‘말’이었다.
이피게니에는 선하고 순종적인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성찰을 잃지 않고, 복수 앞에서도 절제를 잃지 않는다. 끝끝내 자기 자신으로 살아낸 인간만이 말할 수 있는 고결함. 그것이 국왕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순간 한 문명이 또 다른 문명과 비로소 화해에 이른다. 그 말을 통해 괴테는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은 말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말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말은 쉽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살리고, 떠나보내며, 저주의 사슬을 끊어내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말에는 삶이 담겨야 하고, 신뢰가 담겨야 하며,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품격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생각해 본다. 인생은 어쩌면 사소한 일을 위대하게 해내는 지난한 연습의 연속이 아닐까. 단어 하나를, 인사 하나를, 오래도록 품고 살아가는 일. 괴테가 말한 ‘잘 살아’는 단지 작별의 인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찬사였다. 내가 드린 ‘잘 가시게’라는 제안은, 그 찬사의 가장 다정한 우리말이었다.
나는 괴테의 문장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또 스승님의 인생의 통해 언어의 무게를. 그리고 오늘, 그 말을 떠올리며 나 또한 묻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잘 가시게’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삶은 그 한 마디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말이 곧 인생이라면, 언젠가 단어 하나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어떤 말을 남기고,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지금도 내 안에 울린다. 마치 끝없는 회화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잘 가시게, 안녕히. Lebe wo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