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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밤, 함께 읽는 즐거움

이탈리아 기행 낭독을 끝내며

by 아레테 클래식

매주 화요일 저녁이 되면, 아직 낮의 바쁜 기운이 몸 안을 맴도는 시각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책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누구도 크게 소리 내지 않지만, 그 시간에 책의 집 문을 여는 순간 모두가 이미 같은 여정에 다시 올라타 있음을 안다. 지난 몇 달간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여정의 이름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었다.


우리가 손에 쥔 책은 시중에 흔히 팔리는 활자본이 아니었다. 스승님께서 수년에 걸쳐 공들여 옮기신 번역 원고였다. 문장마다 스승님의 숨이 배어 있었고, 괴테가 하고자 했던 원어의 의미를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지켜낸 흔적이 깊었다. 무엇보다 적지

않은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번역을 위해 수년간 이탈리아 곳곳을 다니며 괴테의 발자취를 고증한 노력은 경이로웠다. 우리는 그 귀한 문장들을 하나하나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었고,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낯선 이탈리아 도시들의 하늘빛과 공기, 돌길의 감촉까지 우리 눈앞에 또렷이 펼쳐졌다. 이 책을 낭독할 때마다 마치 괴테가 실제로 방금 로마의 둥근 돔 아래를 거닐고, 옛 폐허 위에 발을 딛고 숨죽이는 순간이 우리 곁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낭독의 가장 큰 힘은 목소리에서 나온다. 활자만으로는 다 전해지지 않던 감정과 숨결이, 서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거치며 때로 부드럽고 때로 거칠게, 새로운 색으로 스며든다. 누군가는 저음으로 괴테의 고독을 읽어 내고, 다른 누군가는 미묘한 떨림으로 베네치아의 빛을 노래하듯 불러낸다. 같은 문장임에도 매번 다르게 들렸고, 그 변화무쌍함이야말로 텍스트가 단 하나의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서로의 낭독을 들으며, 우리는 문장의 결을 손끝으로 만지듯 섬세하게 느끼고, 활자의 경계 너머로 흘러나오는 숨은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날그날 낭독의 분위기에 따라,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늘 새로운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은 우리의 눈과 귀와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함께 낭독한다는 것은 함께 사유한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스승님의 번역을 따라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은 뒤,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언어로 그 문장들을 해석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때로는 한 단어의 선택이, 때로는 괴테의 시선이 머문 풍경이 왜 그토록 의미심장했는지 모두 함께 궁금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서로의 대답은 다시 또 다른 질문을 불러냈다. 낭독은 단순히 소리 내어 읽는 데 머무르지 않았고, 그 문장들이 품은 세계와 우리 각자의 세계가 조용히 맞닿고 뒤섞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텍스트를 읽는 동시에, 서로를 읽고, 더 깊이 이해해 가고 있었다.


괴테가 이탈리아로 떠난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여정은 그의 삶과 사유의 전환점이었고, 낯선 곳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 빚고자 했다. 우리는 그가 쓴 문장을 윤독하면서, 사실은 우리 각자의 내면의 여행을 떠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에 무심히 흘려보내던 사소한 순간들 속에도 괴테의 시선처럼 무언가 새롭게 보이는 빛이 깃들어 있을 수 있음을 배웠고, 언젠가 우리도 스스로를 벗어나 새로운 길 위에 서 보고 싶다는 막연한 갈망을 느꼈다. 낭독 모임은 우리에게 단순히 고전을 읽고 해석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내면을 살피고, 각자의 인생을 조금씩 다시 써 내려가는 자리였다.


밤이 깊어지면 책의 집 창가 밖으로 불빛이 희미해지고, 그날의 분량을 다 일고 나면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빠지곤 했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 속에는 작고 단단한 감동이 빛났다. 같은 문장을 함께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만이 아는 은밀하고도 소중한 결속 같은 것이 그 자리에 있다. 그 결속은 우리가 각자의 일상으로 다시 흩어져도 어딘가 우리를 이어 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주었다. 아마 이것이 함께 낭독하는 고전 독서 모임의 가장 큰 유익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함께 읽으면서 단순히 책 속의 문장만이 아니라, 서로의 목소리와 사유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그리고 서로에게 더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 간다. 책의 집에서 우리는 괴테의 이탈리아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길 위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것은 책 속의 풍경만이 아니었다. 그 길은 언제나 우리의 이야기가 새로 시작되는 자리였다.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이탈리아 땅을 밟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 낭독 모임을 통해 유럽 문명의 보고와도 같은 그 땅을 마치 다녀온 듯 눈부시게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스승님이 들려주신 이탈리아의 햇빛과 공기의 냄새, 로마의 돌길을 밟을 때 발에 전해졌던 미묘한 진동, 베네치아의 물결이 부서지며 만드는 은빛 잔물결 이야기는 책 속 활자만으로는 결코 전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승님의 음성 속에는 그 모든 순간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괴테가 수백 년 전 남긴 글자들이 지금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건너와 새로운 빛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비록 나는 아직 그곳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에 하나의 이탈리아가 뚜렷이 새겨졌다. 이것이 고전을 함께 낭독하는 모임이 주는 또 다른 기적이 아닐까 싶었다.


어느 날 스승님이 먼 허공을 바라보며 읊조리셨던 괴테의 시가 뇌리를 스친다.


아시죠, 저 레몬 꽃 피는 나라


짙푸른 잎새 속에서 황금빛 오렌지가 이글거리고

푸른 하늘에선 한가닥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치자꽃 고요히, 월계수 드높이 서 있는 곳


그곳으로 그곳으로 그 나라, 아시죠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오 사랑하는 이여

아시죠, 그 집! 둥근 기둥들이 지붕 떠받치고,

홀은 휘황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들이 날 바라보며 물어 주는 곳

가엾은 아이야, 무슨 일을 당했느냐고

그곳으로 그곳으로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오! 나의 보호자여.


나는 문득 내가 괴테의 발걸음을 따라 이탈리아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지금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나도 괴테처럼, 그리고 스승님처럼 이탈리아의 거리를 걷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들의 『이탈리아 기행』을 나만의 이야기로 써보고 싶어졌다. 스승님이 허공을 바라보며 읊어주시던 그 시처럼, 언젠가 스승님을 모시고 그곳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낭독 모임에서 함께한 목소리들, 스승님의 이야기, 괴테의 문장들이 오늘도 내 마음 한가운데에 작은 씨앗이 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괴테의 이탈리아 길을 함께 걸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난 것은 책 속 이탈리아뿐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여행의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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