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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Apr 15. 2024

(퇴직일기) 아파트 광고판에 전단지를 붙였다

초중등 독서논술 글쓰기 수업해요

[아파트 광고판에  독서논술 광고지를 붙였다]


지지난 주 금요일 일이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물어보니 아파트 주민은 22,000원이고 주민이 아니면 33,000원이라고 한다. 21장을 출력해오라고 한다. 나는 다시 한번 광고지 문안을 살펴보았다. 아내와 같이 마지막 점검을 했지만, 혹시 넣어야 하는데 빼먹은 내용이 있는지, 불필요한 내용이 적힌 건 없는지 다시 점검했다. 아내는 제목을 더 크게 뽑으라고 했는데, 이미 제목만으로 한 줄을 꽉 채우고 있어서 더는 키우지 않았다. 다만 [초중등 독서논술 글쓰기 수업] 제목이 한 줄에 꽉 차도록 폰트 크기를 조정하여 주민들이 제목만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했다. 강사 이력과 모집부문을 적고 맨 아래에 이름과 전화번호가 들어간 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표를 점선으로 나타내어 출력 후 가위질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내가 공부방을 오래 전에 할 때 익힌 노하우들이었다.


성인반 글쓰기 수업을 하는데, 초등반 중등반 논술 수업도 한다며 광고를 하는 게 창피한 일인가?  창피라는 말보다는 체면 구기는 일인가? 하는 보다 세속적이면서도 직설적인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가령 대학교 교수님인데 수입이 적어 중등반, 초등반을 과외를 맡아 수업을 한다면 그건 좀 체면에 손상이 갈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자녀를 맡기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고마워할지 모른다. 나도 전혀 체면 손상이나 창피함 같은 것은 없었다. 오래 전에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대입전형 논술수업, 토론 수업을 다 해본 경험이 있다. 나는 오히려 성인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고 더 강조했다. 지금 성인반 수업을 하고 있으며, 성인도 글쓰기 관심이 있으면 문의를 해 달라고 적었다.


아내가 알려준 팁 중 하나는 수업료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몇 명일 때는 얼마, 4명이 모이면 얼마 하는 식으로 자세히 적었었다. 경험이 풍부한 아내는 금액은 적지 말고 만약에 문의 전화가 오면 그룹을 만들어 오도록 하여 적은 수업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고 조언을 해준다. 


서울에서 30년째 수업하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초등, 중등 수업 자료는 다 받아놓은 상태였고, 수업비로 어느 정도로 받는지 확인을 해 놓은 상태였다. 광고지를 보고 전화가 한 통화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100퍼센트 확실하지만, 혹시 모를 한 사람을 위해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인다. 이런 광고 경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 이마저도 없다면 어떻게 알릴 방법도 없을 것이다. 전세를 내주고 온 신축 아파트에는 인터넷 까페가 있어서 큰 딸 바이올린 광고도 올리고 실제로 수업을 하겠다는 분들도 있 었다. 하지만 이사온 이곳 구축 아파트는 그런 신식 문화가 없는 곳이다. 돈을 들이고 몸을 움직이고 발품을 팔아야 했다. 


이것은 다 꿈이다. 우리는 공부방 전단지를 붙여봐서 안다. 일주일 게시 기간은 금방 끝이 나고, 자유롭게 뜯어가라고 가위질까지 해놓은 전화번호는 아무도 뜯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문의 전화 역시 한 통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해야 했다. 나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강 앞에 서 있었다. 성인 글쓰기 수업만으로는 내가 계획했던 한 달 생활비를 벌 수 없었다. 어떤 알바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혹시 몰라 22장을 출력하고 전화번호가 적힌 맨 아래 표 부분도 정성스럽게 가위질을 해 놓았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주민번호로 입주자임을 확인하고 무통장으로 비용도 입금했다. 게시 인증이 되는 커다란 도장을 주고는 인쇄물 중 오른쪽 빈 여백쪽에 찍으라고 했다. 거기에는 아파트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게시를 허락한다는 날짜가 조정되어 있었다.


아내와 함께 공부방 전단지를 아파트마다 돌면서 붙이던 15년 전이 생각났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를 중심으로 얼마나 많은 주변 아파트에 돈을 내고 광고지를 붙이러 다녔는지 모른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테이프를 들고 붙이고 있을 때 사람들이 힐끗 거리며 지나가면 괜히 죄 지은 사람처럼 몸도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햇살이 쨍 했다. 낮 기온은 27도를 오르고 있었다. 얇게 걸친 겉옷이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109동 1,2호 라인부터 가서 광고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109동, 108동, 107동까지 일을 했을 때였다. 106동은 반대편에 있어서 맨 마지막에 하고 104동부터 돌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서 논술 수업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단지 일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안고 광고지만 붙이러 다니고 있는데 과호흡 증상이 나타났다. 순간 이게 뭐지? 생각했다. 단지 광고지를 붙이러 가는데 공황장애 증세가 나타난다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나는 호흡이 어떻게 밀려오는지 안다.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집에 가서 비상약을 먹고 다시 나와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아니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다 돌자. 호흡 조절하고 다 돌자. 나는 나를 독려했다. 조금 걸음걸이 속도를 줄이고 호흡을 천천히 쉬면서 남아 있는 103동, 102동, 101동 그리고 마지막 106동을 돌았다. 21장을 다 붙였다. 나는 투명테이프와 출입카드를 관리사무소에 가서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비상약을 찾아 먹었다. 호흡은 안정을 되찾았고 예전 같은 과호흡은 몰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아직은 내게 큰 스트레스로 남아 있나 보다. 나는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광고지 하나 붙이면서 이렇게 숨을 못 쉬니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가슴 죄임과 흉통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아내에게 말을 하긴 했지만 초기 때처럼 돌아간 것 같다고 차마 말할 순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게시판을 이제 광고판에서 사라졌다.


당연히 예상하고 있는 바였지만, 전화나 문의 문자는 한 번도 없었다. 아내가 공부방을 할 때도 그랬다. 몇 달은 그냥 지나갔다. 포기할까 생각할 즈음에 한 명, 한 명 연락이 왔다. 누군가는 전화번호를 뜯어가서 보관하고 있다가, 어떤 기회, 변화의 기회가 올 때 전화를 거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번 일을 시작했다. 조바심을 내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 걱정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재미있는 수업, 학업에 도움이 되는 독서와 논술, 토론 그리고 글쓰기 수업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더 낫다. 


아내가 저녁에 돌아와서는 자기랑 같이 붙이러 다니지 혼자 다 했냐고 한다. 뭐, 얼마 된다고? 하며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도 광고지 붙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 해봐서 알잖아 하면서 나를 안아준다. 그래. 이렇게 이해해주고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으니 좋다. 열매보다는 씨를 뿌리는 마음이다. 이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햇살이 대지를 뚫고 들어가 싹을 틔우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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