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또는 처가어른)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치는 게 싫어요! 내가 내 자식 집에 가는데 허락까지 받아야 하나?
결혼을 하고 독립을 이룬 부부라면 그 저변에 깔린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문화적 명언이다. 오랜 시간 우리 사회에는 '고부갈등'과 '장서갈등'이라는 키워드가 공고히 자리를 잡아왔다. 이 글은 그 '갈등'에서 촉발하였다. 단, 갈등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지고 한 쪽의 편을 들어주려는 정치적인 속셈은 이 글에 없음을 미리 알린다. 그저 지금 우리 사회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어느 집안 어른의 '내 자식 집에 갈 권리'에 대한 사회·문화적 아르케를 탐할 뿐이다.
부모는 결혼한 자녀의 집에 갈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시대정신을 배제하고서라도 의외로 한 번쯤 생각해 보면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물음이다. 기혼과 미혼, 자녀의 유무를 떠나 타인과 어깨를 부딪히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통찰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인 결혼과 출산을 넘어 '관계'와 '권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내 자식 집에 갈 권리'는 있다. 그 집을 부모가 해줬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낳고 기른 자녀가 살고 있는 보금자리에 방문할 권리는 통념상 얼마든지 허락된다. 오히려 부모를 집에 오지 말라고 선언하는 자식이 천륜을 거스르는 인상을 준다. 모든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소유욕과 소유권이 있기 마련이고 그 욕구와 권리를 표출하는 방법이 기질에 따라 다를 뿐이다. 하물며 자식이 성장하여 결혼과 독립을 한 후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 궁금해하고 가까이하고 싶고 나아가 바꾸고 조절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하진 않더라도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혼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는 비단 사랑의 약속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법적 제도로 약속하지 않는다. 사랑은 로맨틱한 언어나 추억, 그러한 애틋한 순간들의 추상을 통해 약속된다. 결혼은 사랑이 아닌 '책임'에 대한 약속이다. 책임은 사랑보다 훨씬 사회적이고 물리적이다. 따라서 책임을 약속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지적 성숙함을 기초로 한 사회성, 경제성, 가정환경, 이념, 화법, 행동양식, 습관, 생활패턴 등을 모두 아우른다. 결혼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정의하는 동시에 두 사회인이 서로의 삶을 함께할 책임에 대해 그 능력과 의지를 담보하는 계기이다.
구태여 결혼을 어렵게 정의했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단순하다. 결혼은 오직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니다. 책임을 거래하는 계약적 사건이며 단적으로 그 책임이란 양자의 집안과 그 집안 구성원들을 포함한다. 결혼 전에 이미 가족들과 절연하여 그 책임을 미리 덜어낸 경우가 아니라면, 결혼을 했음에도 서로의 가족(나아가 상대방의 인적 관계의 장 전반)을 보살피지 아니 하는 것은 어쩌면 배임에 해당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더라도 두 사람의 성장과 책임, 그리고 결혼에 대해 전적으로 영향을 끼친 양가 부모님은 분명 주요한 이해관계자이다. 여기에 부모라는 사회적 위치까지 더해지면서 자식에 대한 여러 권리가 만들어진다. '내 자식 집에 갈 권리'는 그렇게 잉태된다.
주의할 것은 모든 권리의 근거인 '관계와 사회'에서 나만 권리를 가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권리는 양방향이다. 부모가 출가한 자식 집에 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자식과 며느리(또는 사위) 또한 모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집에 사는 '거주자로서의 권리'다.
집은 본래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존재이다. 즉 목적과 본질을 이미 전제하고 만들어진 인류의 생산물이다. 그 목적으로 말미암아 집을 만든 창조자(건설사)나 법리적 소유자와는 별개로 집을 '집'답게 만들어주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거주자'이다. 이를 철학에서는 '합목적성'이라고 한다.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집'에 대해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거주자'야말로 집에 대한 합목적성을 가진다. 나아가 '합목적적 권리'를 부여받는다.
쉽게 말해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임대인이 집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집에 살고 있는 임차인의 허가나 협의 없이 집을 마음대로 방문하고 수정하고 이용해선 안된다. 이건 법리적 주인조차 규제를 받아 마땅한 거주자가 가지는 합목적적 권리의 힘이다. 이 권리는 하나의 통념이나 상식이기 때문에 이러한 합목적적 권리를 법에서도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자식이 사는 집이든, 그 집이 부모의 소유든, 그 집을 사준 사람이 부모이든 관계없이 그 집의 거주자인 자식 내외의 합목적적 권리를 부모는 존중해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에는 종종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양립할 수 없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내가 '담배를 피울 권리'를 지키는 것과 타인의 '담배 연기를 마시지 않아도 될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무지하고 미숙해 보인다. 그저 사람들이 담배 연기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별도의 공간이나 그러한 장치가 마련된 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두 권리는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내 자식 집에 갈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자식 내외가 가지고 있는 '거주자의 권리'를 묵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자못 당연하다는 관념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나의 권리만 생각하고 자신의 권리행사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묵살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위임받으려 한다. (사실 그런 식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복잡한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첫째는 내가 나의 권리를 지키려 한다는 의도를 철저히 숨길 것. 두 번째는 타인이 본인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도록 할 것. 역사상 수많은 독재정치와 비참한 가스라이팅은 이 두 가지 작업 하에 이루어졌다.)
상호 간의 권리가 명확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전술한 것처럼 한 쪽에서 자신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할 경우 역사상 항상 크고 작은 분쟁 -역사적 사건 중 투쟁, 전쟁, 분쟁이라는 명칭이 붙은 모든 것이 그러하다- 이 일어났다. 달리 말하면 필연적으로 평화가 깨진다. 따라서 혹여 내 자식의 결혼 생활에 분쟁을 일으키고 싶다거나 평화로워 보이는 환경을 도저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특이' 취향의 부모라면 얼마든지 '내 자식 집에 갈 권리'를 남용하라.
반대로 자식이 순탄하고 평화롭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원한다면, '내 자식 집에 갈 권리'뿐만 아니라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자식 내외가 가지고 있을 '거주자로서의 합목적적 권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라. 그 존중과 배려에 능통하지 않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 아주 쉬운 방법으로 자식 내외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 너희 집에 들러도 괜찮겠니? 나는 이때가 좋은데 언제가 좋겠니? 반찬도 주고 손주들도 보고 싶어서 너희 편할 때 잠깐 들르마.
잠깐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가 가진 '내 자식 집에 갈 권리'를 이용해서 '미리 언질을 주고 논의하면' 그만이다. 논의를 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법적 행동이다.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논의를 하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식 집에 가는데 허락까지 받아야 하냐라는 생각은 자신의 권리만 고려한 삐뚤어진 결과 값이다. 논의를 통해 나의 권리와 상대의 권리를 모두 지키고 이를 통해 상대가 자신의 권리가 존중받고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사회적인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닐까.
평화적으로, 모두가 만족하며, 나아가 시부모/처부모로서의 권리와 권위까지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평화를 깨고, 누군가는 반드시 불만족하며, 집안 어른으로서의 일방적 권력은 생기겠지만 근본적인 권위는 잃어버릴 수 있는 방법 또한 여기에 있다.
p.s. 참고로 '내 자식 집에 갈 권리'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치환이 가능하다. 법의 영역을 떠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는 타인의 권리와 양립할 때 비로소 사회적 권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