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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Seeker Oct 01. 2016

여행은 연애, 사는 건 결혼-4

낙원의 일상


여행과 연애는 '낭만적인'이란 형용사와 나란히 쓰인다. 멋진 풍광, 맛있는 음식, 나를 설레게 하는 대상과 곧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여행과 연애는 그렇게 같은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여행 가고 싶다."라고 말하는 이의 어조와 표정은 "연애하고 싶어."라고 푸념하는 이의 그것과 일치하나 보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완벽한 낙원으로 극찬하는 그곳에도 일상의 빳빳함은 존재한다.


쓰레기는 로봇팔에게


여행자로 호텔에 머무는 동안 청소라는 일과에서 자유롭다 보니 타국에서 내가 만든 쓰레기엔 무심했다. 그러나 거주자로 입장이 바뀌고 나니 일상생활의 부산물로 생기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그곳 나름의 방법을 배워야 했다. 배송된 가구와 전자제품을 포장했던 커다란 박스를 노란색 뚜껑이 달린 재활용 쓰레기통(240L)에 버리려면 B4 정도의 크기로 해체해야 한다. 서울에선 통째로 내다 놓으면 그만인 두꺼운 하드보드지를 종이 먼지를 들이마시며 칼로 톱질하듯 작은 조각으로 자르는 건 커다란 일거리였다.


우리보다 12일 늦게 서울에서 미리 보냈던 살림살이가 브리즈번 집에 도착했다.  현지 이삿짐 센터 직원 3명이 짐을 옮겼는데 큰 가구만 집안에 배치해 주고 책과 접시 등을 담은 박스들은 차고에 삼단으로 쌓아두고 가버렸다. 박스 안에 물건들을 정리하는 건 중학생인 아이들이 후다닥 해주어서 금방 끝낼 수 있었지만 2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박스들이 문제였다. 그걸 다 분해해서 버리려니 엄두가 나지 않아 차고 한쪽에 보관하기로 했다. 돌아갈 때도 소소한 짐들은 직접 싸야 할테니까. 작은 박스를 접어서 큰 박스에 세워 넣고 뽁뽁이까지 차곡차곡 박스에 눌러 담으며 서울에서 당연하게 여겨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제품을 설치해주고 포장지까지 말끔히 수거해 가는 가전, 가구 회사의 서비스와 잔짐까지 몇 시간 내에 싸고 다시 제자리에 정리해주는 포장이사의 세심함이 그리웠다. 물론 돈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편리함이지만 고객에 대한 배려라는 걸 누릴 수 없는 환경에 처해보니 내 나라의 장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브리즈번의 로봇팔 달린 쓰레기 수거 트럭


브리즈번에선 일반 쓰레기는 매주 한번, 재활용 쓰레기는 2주마다 정해진 요일에 버리도록 되어있다. 내가 살던 Forest Lake에선 수요일 저녁이면 이웃집 사람들이 도로 가장자리에 하나 둘 내다 놓는 쓰레기통의 투박한 바퀴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진다. 목요일 아침 7시, 초록색 쓰레기 수거 트럭이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집 앞 도로에 나타난다. 트럭 측면에 달린 거대한 로봇 팔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통을 번쩍 집어 들어 쓰레기를 트럭에 쏟아붓고 사뿐히 내려놓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땐 너무 신기해서 동영상까지 찍었다. 기술이 서투른 기사는 쓰레기통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사라지기도 한다. 호주에선 시간당 최저 임금이 약 15,000원(2013년 기준)이다 보니 우리처럼 사람의 손을 빌려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보다 기사 한 명이 운행하는 로봇팔 트럭으로 쓰레기를 수거하는 것이 비용면에서 더 효율적일 것이다.


물쓰듯 물을 못쓰는 호주


폭우가 내리지 않는 한 브리즈번의 월 강수량은 200mm를 넘지 않는다. 2001년에서 2008년 사이 한때 댐 저수량이 20% 아래로 내려갈 정도로 극심한 가뭄을 겪었기 때문에 호주인들은 샤워를 평균 10-15분 이내에 끝낸다. 우리가 여름철 누진세로 불어난 전기요금을 걱정하듯 호주에선 수도요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물을 아껴 쓸 수밖에 없다. 화장실 변기, 정원 관리, 세탁에 사용되는 물은 마당에 설치된 커다란 물탱크에 받아둔 빗물을 우선 사용하도록 수도 배관이 설치되어 있다. 저수조안에 빗물을 정화시키는 장치가 있다고는 하는데 비가 많이 온 날 변기 물을 내리면 흙탕물이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브리즈번은 1월과 2월에 비다운 비를 볼 수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지나갈 땐 크고 작은 나무가 부러져 길을 가로막고 며칠씩 누워있기도 하고 번개가 치면 정전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낮보다 밤사이에 소나기가 더 많이 내려서 이른 아침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햇빛을 반사시켜 유리 장식을 달아놓은 것처럼 이파리들이 반짝거린다.


호주의 주택 마당에 설치된 2000L 용량의 빗물 저장 탱크   


호주는 수도요금과 전기료를 3개월 단위로 부과하기 때문에 처음 석 달 동안 매일 쓰는 물과 전기에 대한 비용을 가늠하지 못해서 예상보다 많은 액수가 적힌 고지서를 받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물 사용량으로 수도요금이 부과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물공급비가 따로 책정되기 때문에 호주는 전기보다 물이 더 비싼 나라이다.


수도요금 고지서는 집주인의 주소지로 발송되며 물공급비는 집 소유주가 부담하고 사용한 물값만 세입자가 낸다. 요금 고지서를 집주인이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 전달하면 담당 중개인이 다시 이메일이나 우편으로 고지서 사본을 세입자에게 보내고 세입자는 수도요금을 부동산의 계좌로 입금하게 되어 있다. 월세도 주인에게 직접 송금하지 않고 담당 부동산에게 매주 송금한다. 중개사무소가 세입자를 소개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의 관리도 담당하기 때문에 중개 수수료를 일시불로 받지 않고 매주 임대료에서 일정 금액을 떼고 주인에게 송금한다. 따라서 세입자는 중개 수수료를 따로 부담하지 않고 집을 사고팔 때도 매도자만 수수료를 지불한다.


잔디는 왜 그리도 빨리 자라는지


잔디의 종류가 그렇게 다양한지 브리즈번에 와서 처음 알았다. 아이들 학교의 운동장은 연둣빛의 짧고 가는 잔디가 심어져 있었고 이웃집 앞뜰에선 잎이 제법 굵고 긴 녹색의 잔디를 볼 수 있었다. 내가 임대한 단독 주택은 집 앞 도로와 현관 사이의 앞뜰(약 4평)과 거실과 주방이 접한 ㄱ자의 안마당(약 9평)이 모두 잔디로 덮여 있었다. 강한 햇살 덕에 여름엔 적어도 2주에 한번, 다른 계절엔 3주마다 잔디를 깎아야 했다. 이웃집 잔디들은 면도기로 짧게 밀어버린 헤어스타일처럼 항상 잘 다듬어져 있었지만 우리 집 잔디는 초보 미용사가 망친 커트 머리처럼 뭔가 부족해 보였다.


Bunnings Warehouse-lawn mower와 다양한 종류의 목재들


잔디에 물 주는 방법과 시간대는 집주인에게 배웠고 잔디 깎는 방법은 아빠(기러기)와 아들이 잔디 깎는 기계(lawn mower)의 매뉴얼을 보고 터득했다. 정원사(Gardener)에게 잔디관리를 맡길 수도 있었지만 직접 해보고 싶어서 Bunnings Warehouse(화초, 정원용품, 목재, 페인트, 문, 욕실과 주방의 건축자재, 공구 등을 파는 대형매장)에서 잔디 깎는 기계를 450 AUD에 구입했다. 졸지에 잔디 깎는 일을 떠맡게 된 아들에게

"아파트에서만 살던 우리가 언제 다시 잔디를 깎아 보겠니? 힘들겠지만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남을 거야. 엄마가 같이 해줄게."

라고 구슬렸다.

브리즈번에서 두 해를 넘긴 언젠가 정원에 대해 아들이 한 얘기의 요지가 이랬다.

"스쳐 지나가는 행인에겐 잘 가꿔진 정원이 가질 수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담장 안에서 그걸 누리려면 물 주고 잡초 뽑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mower를 미는 건 나도 할 수 있지만 몸체 앞에 달린 모터에 시동을 걸려면 아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모터 옆에 붙은 줄을 1m 정도 사선으로 힘껏 잡아당겨야 하는데 5번 시도하면 1번 시동이 걸릴 정도로 힘(요령?)이 부족했다. 경운기 소리와 비슷한 요란한 모터 소리에 탄력을 받아 손잡이를 힘껏 앞으로 밀면 모터 아래에 달린 묵직한 톱날들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잔디와 잡초를 타다닥, 쉬시식 자르는 소리가 손끝에 전해진다. 잔디 깎기 기계가 지나간 자리에 한 줌 크기로 풀 무덤이 떨어지면 뒤쪽에 달린 상자가 가득 찬 거다. 시동을 끄고 상자의 손잡이를 당기면 촉촉한 풀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흩날리는 잔디 파편들을 가르며 마당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지만 삐죽 빼죽 눈에 거슬리던 잡초가 사라지고 깔깔하게 다듬어진 잔디를 좌에서 우로 쓰윽 훑고 나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칼날에 베여 토막난 잔디 끝에서 한꺼번에 증발하는 물기로 인해 해질 녘 공기는 기분 좋은 초록빛 잔디 냄새로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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