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살이 첫 일주일
12월의 여름
2012년 12월 9일 아침, 브리즈번과 서울 사이의 시차는 1 시간이지만 계절은 정반대. 서울의 초겨울 찬바람에 피부의 숨구멍들이 작아져 버린 탓인지 브리즈번 공항의 공기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밤 9시부터 아침 7시까지 좁은 비행기 의자에 앉아있느라 잠을 못 잔 몸 상태로 겨울에서 여름으로 날씨까지 바뀌니 이래저래 생체리듬이 깨져서 나와 아이들은 도착 첫날 아주 힘들었다. 최소한 탑승객의 수면시간을 배려해주는 비행 스케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건지 모든 항공사에게 묻고 싶다.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최첨단 교통수단이 가장 불편한 모순을 우리는 얼마나 더 겪어야 하나?
기내 에어컨이 쏟아내는 인공적인 공기를 10시간 이상 들이마시고 나면 도시 특유의 냄새가 느껴진다. 인천 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길엔 아린 금속성 냄새가 코를 자극하지만 브리즈번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땐 달달한 자스민향이 폐 속까지 퍼진다. 아열대 기후대에 속하는 브리즈번의 주택들은 콘크리트나 쇠창살보다 나무와 관목으로 담장을 두르는 곳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일 년 내내 꽃을 피우는 자스민 울타리를 많이 볼 수 있다. 브리즈번의 공기는 들숨과 날숨을 편안하게 만드는 뭔가가 그 안에 있다.
Opening Accounts
해외살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휴대폰을 개통하는 것이다. 은행계좌를 만들고 인터넷, 가스, 전기 공급을 전화로 신청하려면 먼저 내 명의로 된 휴대폰 번호가 있어야 한다. 유학원의 도움을 받아 브리즈번 시내에 있는 현지 통신사 Vodafone 지점에서 휴대폰 서비스를 신청했다. 여권, 비자, 집 계약서의 사본을 제출하고 신용카드로 요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9자리의 현지 번호를 받았다. 신용이 불확실한 외국인이란 이유로 인터넷과 휴대폰의 통합 서비스는 가입할 수가 없어서 인터넷은 TPG, 집전화는 Telstra라는 통신사의 서비스를 따로 이용해야 했다. 6개월 동안 사용료를 성실히 납부했더니 통합 서비스를 권유하는 통신사들의 우편물이 우체통에 넘쳐났다. 호주는 아직도 전화선을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기 때문에 데이터 처리 속도가 느리고 집전화도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Wi-Fi가 없는 곳에서 휴대폰으로 5시간 인터넷을 사용하면 50만 원을 데이터 사용료로 지불해야 할 만큼 요금이 비싸다. 한국에선 기본으로 제공되는 데이터 한도 내에서 버스에서 음악을 듣거나 거리에서 정보를 검색할 수 있지만 호주에선 한국과 비슷한 요금제로는 겨우 노래 몇 곡 스트리밍 할 수 있는 데이터만 사용할 수 있다.
도착한 다음날 은행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유학원에서 한국인 은행 직원과의 면담을 예약해주셨다. 약속 시간에 Commonwealth Bank를 방문하니 여직원이 2층에 있는 독립된 사무실로 안내했다. 필요한 개인 정보가 컴퓨터에 입력된 후 두 가지 종류의 은행계좌가 발급되었다. 하나는 이체가 가능한 보통예금이고 다른 하나는 입출금만 할 수 있는 적금형 예금인데 둘 다 계좌 번호만 존재하고 통장은 발급되지 않는다. 현금의 입출금은 현금카드(일주일 후 우편으로 발송)로 하고 통장 거래 내역은 인터넷 뱅킹(NetBank)으로 확인해야 한다. 한국보다 호주의 예금 이자율이 높은 편이나 이자에 대한 세금도 절반 가까이 부과된다. 가스, 전기, 통신 요금도 인터넷 뱅킹에서 Bpay라는 형태로 지불할 수 있다. 이메일이나 우편으로 발송되는 고지서에 기재된 회사의 특정 계좌 번호(account number)와 15자리가 넘는 고객 번호(reference number)를 모두 입력해야 하지만 거래 내용이 저장되어 두 번째 송금할 땐 액수만 입력하면 된다.
AS를 제대로 받으려면
브리즈번 도심의 번화가나 쇼핑몰에선 가전제품과 가구를 판매하는 곳이 없고 고속도로와 인접한 시 외곽에 대형 할인 매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전제품은 The Good Guys에서 구입했고 프린터기의 카트리지와 사무용품은 Officeworks를 이용했다. 가전제품 AS를 신청하려면 무상 수리 보증서뿐만 아니라 구입한 매장의 주소와 구입 날짜가 적힌 주문내역서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가전회사 수리센터에 전화로 제품의 모델명만 알려주면 늦어도 2-3일 안에 수리를 받을 수 있지만 호주에선 판매처와 제품 고유번호를 모르면 접수 처리가 늦어져 1주일이 넘어도 수리를 받을 수 없고 수리비용도 전액 떠맡아야 한다. 삼성과 LG 같은 한국 전자 제품도 같은 절차를 따르니 제품을 구매할 때 매장 직원이 작성해 준 주문 내역서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의류, 침구류, 장식 소품을 판매하는 Target에서도 다리미, 토스터기, 믹서기, 히터 같은 소형가전을 팔지만 중국산이라 금세 고장이 난다. 산지 두 달만에 히터가 고장 나서 영수증과 함께 판매처에 들고 가 작동이 안 되는 부분을 설명했더니 바로 환불해 주었다. 호주에선 가전제품과 가구의 주문 내역서와 영수증을 잘 보관해야 소비자의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운송비 따로, 조립은 셀프
호주는 가구의 판매 방식도 우리와 다른 점이 많다. 가구 매장 IKEA와 AMART에서 진열된 완제품을 보고 구입할 침대와 서랍장을 선택했더니 조립 전 단계의 크고 작은 나무판, 손잡이, 나사들이 박스에 포장된 형태로 제품이 판매되었다. 그리고 가구나 전자제품을 집까지 배송받으려면 5-6만 원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배송 기사는 상자만 내려주고 가버리고 설명서를 보고 직접 가구를 조립하는 건 구매자의 몫이다. IKEA에서 설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배송료와 설치비용으로 서랍장 하나 값(약 12만 원)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렇듯 높은 인건비로 인해 호주 사람들은 집집마다 차고에 전기 드릴, 전기톱, 공구 캐비닛을 갖추고 가구와 담장, 심지어 집까지 뚝딱뚝딱 직접 만들고 조립한다. 내 이웃집 할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조립한 2인승 빨간색 클래식 오픈카를 타고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트에 가셨다. 호주에선 개인이 만든 수제차가 도로를 주행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성능 검사를 통과하면 내가 만든 자동차를 탈 수 있는 곳, 아마추어의 능력도 존중해 주는 유연한 사회 - 서울의 도로 위에서도 가까운 미래에 운전자가 손수 만든 작품들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