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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ol Park Nov 01. 2024

Taylors, The Visionary

수많은 축제를 위하여,

Taylors, The Visionary, Clare Valley

Cabernet Sauvignon 2012 (No.9085)

수많은 축제를 위하여,


1.

카베르네 쇼비뇽의 고향은 프랑스 보르도이지만, 호주 Wakefield강 유역의 와이너리 Taylor 에서는 오랫동안 쓸만한 포도를 생산해왔다. 이 지역의 와인은 나파벨리 카베르네 쇼비뇽이 선사하는 강렬함이나, 보르도 와인의 섬세함을 견지하지는 못하지만 신선한 과실향과 산도, 그리고 타닌의 아름다운 조화가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2012년산 Visionary는 굉장히 풍부하고 복잡한 향과 적당한 산도, 타닌이 굉장히 부드럽고 밸런스감 있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블랙 커런트, 블랙베리, 바닐라, 유칼립투스, 커피향의 신선함은 물론 오크, 가죽, 스모크, 아몬드, 옅은 시나몬향이 입안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쇠고기 스테이크, 양고기 스테이크, 닭고기 요리를 포함한 모든 육류와 향이 강한 치즈/초리조의 조합 그리고 화약 냄새와 멋들어지게 어울린다.


2.

문자 그대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두 번째 디왈리를 보냈다.

디왈리는 힌두교 최대의 축제이자 부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 락슈미를 기념하여 빛과 풍요와 평화를 위해 집집마다 수많은 등불을 밝히는 축제로 흔히 '빛의 축제'라 불린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는 밤이 저물도록 수많은 빛들이 피어났다 흩어졌다.


원시의 신화에서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빛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엿보인다. 켈트족의 축제에서 비롯된 할로윈은 일년중에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악령들을 위로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제의였으며, 부활절은 마침내 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춘분을 기점으로 제정되었다. 이러한 메타포는 물론 현대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아도르노는 “불꽃놀이는 예술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그 영상이 최고로 완성된 순간에 보는 이의 눈앞에서 다시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찰나이지만 칠흑 같은 세상을 밝히고 스러진 불꽃같은 삶에 작은 희망과, 긴 애잔함과 무한한 동경을 느꼈을듯 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진리가 마침내 인류의 오랜 미학이 되었다.


3.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el 1525-1569)의 ‘염세주의자 (The Misanthrope, 1568년경)’ 라는 작품을 오래도록 좋아했다. ‘세상은 믿을 수 없으므로 나는 상복을 입는다’. 검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사력을 다해 길을 걷는 노인의 뒤에서 누군가 지갑을 훔치고 있다. 앞만 보며 길을 걷는 노인이 옳다고 여겨진 적도, 멋지다 여겨진 적도 많았기에 열심히 걷는 이들의 얼마 안되는 노잣돈을 탐하는 세상이 때때로 원망스럽곤 하였다. 아마도 불꽃같이 올곧은 삶을 동경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얼마 전 이 그림에서 문득 한점의 Vanitas가 읽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인간은 길을 걷느라 지갑을 잃어버린지도 깨닫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존재인것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이 거장이 말년에서야 남긴 이 작품은 진리를 향한 갈급함에 갇혀 오히려 삶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자 풍자였다. 그 이후로 그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우화들을 계속 그렸으며, 실제로 죽기 직전 아내에게 그림의 대부분을 불태워 없애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존 레논이었나 “Life is what happens to you while you're busy making other plans / 인생이란 네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것이란다.” 라고 했던 이가.

생의 목적은 진리, 다시 말해 의미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생이 한없이 덧없다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조차 마침내 찰나에 흘러갈 뿐이라는 깨달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 다 모아봐야 기껏 폭죽 한 발 와인 한병이다. 진부하게도 결국 그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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