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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소년 Aug 24. 2016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서

내 제주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부터 도망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나에게서 가장 먼저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내게는 어떤 공허함과 아픔이 있는데 그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찾아왔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눈가에 고인 눈물. 축 처진 어깨와 근육이 풀려버린 듯 비틀대는 걸음걸이. 나는 아파서는 안 된다. 나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나에게서 한 발 떨어져 내가 겪는 아픔의 원흉을 찾는 일이었다.


 내게 남은 것이라곤 한 권씩 쌓여가는 책과 사진 한 장씩 쌓아가는 카메라뿐이었다. 책과 카메라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어떤 곳이든, 누구든 만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간직해주었다. 책은 사람과 발이 되어주었고, 사진은 기록이 되어주었다. 어쩌면 내게 남은 것은 내가 가진 전부였는지도 모르겠다. 책과 사진은 내게 여행이었다.

 내가 가진 아픔으로부터 유일하게 멀어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아니 그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오직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시간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사진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이의 글을 읽기도 하고, 내 글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기도 하고, 내가 직접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내가 글을 쓰거나 사진 찍는 실력이 형편없어서 다른 작가들의 것을 많이 본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쓰는 글보다 읽는 글이 많고 찍는 사진보다 보는 사진이 많았던 작년 가을, 일주일에 한 번씩 들르던 서점 신작 에세이 코너에서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깔끔하고 간단한 표지. 표지만큼 간단한 제목. 그 안에는 제주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그 후에는 제주에 살면서 하나의 삶을 만들어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한 대학생을 저 먼 국가에서 800km가 넘는 거리를 걷게 하였는지, 그리고 제주에는 무엇이 있기에 그녀를 그곳에 살게 하였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녀가 어떻게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제주에 살게 되었는지가 더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책을 덮은 이후로 내 온 정신은 제주로 건너가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찼다.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많은 삶을 변하게 한 제주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환상의 섬. 그곳에 가면 어쩐지 아파서는 안 되는 나도 마음 놓고 아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파도 아프지 않아야 했던 삶. 여태까지의 내 삶은 마치 끝없는 불길을 걷는 시간이었다.

 그곳에는 한적한 마을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여성이 필요한 가구를 손수 만들며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바람과 차가운 겨울바다에 세월이 베여도 일생을 받치는 해녀들의 삶이 존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시간이 찬란한 무지개만큼이나 아름다운 여행자들의 발걸음도 끊이질 않았다.


 멀리서 보면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별처럼, 멀리서 보았을 때는 한 점에 불과한 그 섬.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수많은 삶을 만나다 보면 그 안에는 거대한 세상이 존재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 거대한 세상에서 내 아픔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죽어가는 수많은 삶에 숨을 불어넣어준 환상의 섬이었으니까.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제주도뿐이었다.


 글 쓰고 사진 찍는 내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나의 마지막 도피처. 최후의 땅. 지구를 덮은 푸른빛 바다와 구름에 어우러진 달콤한 하늘. 수많은 삶을 살아 숨쉬게 한 환상의 섬. 내게 남은 곳은 이곳 뿐이었다.


 내가 떠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내 제주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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