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우리는 진심이었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우리의 밤은 서로에게 애틋해선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나누는 애정은 새벽이 울면 어둠과 함께 흐려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난 그것도 모르고 당신에게 내 전부를 주었다. 내 눈물과 내 미소와 내 사랑과 내 마음 또 마음. 이 밤이 지나면 당신과의 이별이 다가올 것이다. 난 이 밤이 떠나가기 전에 당신에게 내 전부를 던졌야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당신에게 나라는 사람을 남기고 싶었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느꼈고, 밤하늘에는 별이 빛났다. 내 눈은 별과 당신을 담았다.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게스트하우스의 밤은 뜨겁다. 낯선 여행객들이 모여 어색한 인사가 오고 가는 듯싶다가도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친구와 함께 보내는 밤은 어떨까? 술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어둠이 내린 밤. 이곳은 취하기에 충분한 밤이 된다. 당신은 그저 친구와 함께 취하고 싶은 것에 취하면 된다. 술에 취해도 좋고, 밤하늘에 취해도 좋고, 밤바다에 취해도 좋다. 분위기에 취하고, 쏟아지는 별에 취하고, 친구들의 부풀린 여행 이야기에 취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에 취하든 우리의 밤은 오직 여행이라는 이름 앞에 아름다울 뿐이다.
이 아름다운 밤이 다가올 즈음 게스트하우스에서 체크인을 도와주며 사람들과 제주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여기 살면서 매일 밤 파티하면 나름대로 정들 텐데, 사람들이랑 헤어지는 게 슬프지 않아요?"
나는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다.
"이별 또한 여행이니까요."
밝게 웃으며 내뱉는 말과 다르게 속으로는 쓰게 웃었다. 이별 또한 여행이라고 헤어짐이 슬프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니까. 좋은 사람들과의 이별은 언제나 아쉬운 법이다. 사람이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특히 이별의 슬픔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 이별을 이겨내는 법을 몰라 나는 그것 또한 여행이라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나라면 매일 밤 술 마시고 정든 사람이랑 헤어지는 거 못할 것 같아요. 선을 그어놓고 친해지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그런 거리에 있을 것 같아. 아침마다 배웅하는 거 엄청 잔인해요. 나라면 우울증 걸릴걸요? 그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돼."
아침마다 배웅하며 건네었던 인사. 주고받는 연락처. 내 아침은 그녀의 말처럼 잔인했다. 시간이 지나면 인사는 잊혀졌고, 연락처는 지워졌다.
나는 겨우 낯선 만남과 여행이라는 이름의 이야기 속에 파묻혀 매일 설레는 마음이 더 컸을 뿐. 그 기대로 버텼을 뿐. 그들을 떠나보낸 뒤에 공허한 마음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분명 그들의 마음 하나하나 모두 그리웠다. 다행히 그리움이 나를 지배하기 전에 제주라는 동화가 막아주어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던가, 모든 것을 열어두었던 내 마음에 선을 그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같은 표지판을 내 마음으로 오는 길 중간에 떡하니 세워두었다. 이것만이 나에게 다가온 이별의 슬픔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표지판은 온전히 나라는 사람 그 자체로 살아가던 때에 다시금 나를 감추는 일이었다.
그런데 표지판은 태권도장의 격파용 송판처럼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반으로 쩍 갈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이 표지판은 초등학생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선을 그은 그날 밤도 내일 이별할 것을 알면서 당신에 취했으니까. 술잔에 여행을 담아 당신과 부딪혔으니까. 매일 밤 다가오는 우리 여행자들의 교류는 고작 표지판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이 무섭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지고 흐려지고, 동이 트는 그 순간까지도 서로에게 기대어 여행으로 물들었다. 나에게 슬프지 않냐고 물은 그녀 또한 함께였다. 나는 당신과 곧 있을 이별을 두려워하면서도 당신에게 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여행 중이었으니까.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처럼 제 갈 길 찾아가는 여행자들을 배웅하기 위해 거실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자리를 지켰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주변은 마치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기 전처럼 고요했다. 이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거대한 폭풍을 초월해버린 고요. 나는 그런 고요함이 지속되길 바랐지만, 이내 곧 노래를 틀었다. 여행자들의 아침까지 고요함에 덮어버리는 건 이기적일 수도 있으니. 그들도 그들만의 여행이 있다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었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아침이 더욱 밝아오자 여행자들은 한 명씩 방에서 나와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다가올 여행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들의 표정에 미소를 지으며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여전히' 그들을 배웅했다.
표정은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그들을 보내주었지만, 마음은 방 한구석 초라하게 빛나는 조명과 같았다. 나는 배웅이라는 이름의 이별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곧 내게 헤어지는 게 슬프지 않냐고 물었던 그녀도 짐을 들고 여행을 맞이하러 나왔다. 그녀를 보자 어제 그 질문이 떠올라 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았다. 그녀는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발을 신고서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어제 진심으로 즐거웠어요."
진심이라는 단어가 마음까지 타고 들어왔다. 나도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도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놀러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진심으로."
"그럴게요. 얼굴 까먹지 마요. 꼭 다시 돌아올게요."
꼭 다시 돌아올게요.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손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계단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떠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 익숙한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오늘 아침의 그녀는 어제 질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다시 돌아오겠다며 웃는 그녀의 표정은 이별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표정이 정해져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슬픔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이별 앞에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 우리의 짧은 이별 속에서 그녀의 표정과 대화를 상기하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꼭 다시 돌아올게요.'
이별하는 중에 그녀가 했던 말이다. 그녀의 말은 우리가 이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꼭 다시 돌아올게요. 우리의 이별은 슬플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헤어짐을 걱정해 선 따위 그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별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함께한 그 순간에 거짓은 없었다. 모두 진심이었다. 우리의 이별은 이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나는 얼른 뛰어가 창문을 열고 그녀를 찾았다. 다행히 그녀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이자 나는 크게 소리치며 우리의 아름다운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누나, 생각해봤는데요. 매일 헤어지는 게 슬프긴 해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누나는 내게 분명 진심으로 즐겁다고 했어요. 그리고 꼭 다시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헤어지는 게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영원히 이별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만날 거잖아요.
우리들 모두 그 밤은 진심이었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그거면 됐어요. 우린 이별한 게 아니라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거예요. 그러니까 꼭 돌아오세요. 꼭 돌아와야 돼요. 여기서 이 모습 그대로 누나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소리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 주변 소음에 내 목소리가 닿지 않을까 걱정해서도 아니고, 그녀가 이렇게 멀리서 소리 지르는 나를 부끄러워할까 봐 걱정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진심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통하는 거니까. 내 말이 전해지지 않아도 그녀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기를 간절히 바란 건지도 모르겠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에 내 마음을 실어 보내면 언젠가 그녀에게 닿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추억 속에 잠시 들려 반갑게 손을 흔들면 된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싱긋 웃어주겠지. 그녀 또한 밝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 것이다. 나는 이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그녀를 기다리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의 밤을 추억하며 어린아이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각자의 보물을 바라보듯 그녀를 눈에 담았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서, 반갑다고 꼭 안아주기 위해서, 우리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창가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하다. 여행하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만남과 우리의 밤과 우리의 이별은 진심이었다. 우리는 이별이라는 이름을 빌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것이 제주에서 만난 우리가 이별하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