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고모라 (GOMORRA)

우리는 이제, '대부'를 떠나보내야 한다

'대부'가 그리 대단하더냐


올해 여름 쯤이었을 것이다. '대부'라는 영화를 꺼내 들었다. 간만에? 아니 난생 처음이었다. 나와 비슷한 세대, 혹은 나의 윗세대를 사는 남자들은 특히 의아해 할 것이다. '대부'를 여태 안봤다니… 난 원래 총질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가령 그 많은 ‘007’시리즈는 단 한편조차 제대로 본 일도 없거니와 정히 땡기지도 않는다. 허나 고작 ‘007’ 따위를 감히 '대부'에 견줄 일은 아닐 것이다. 지구촌 최대 온라인 영화 정보망인'IMDB'에선 평점 9.2로 '쇼생크 탈출'(9.3점)에 이어 당당히 역대 2위(3위는 대부 2편)에 이름이 올라있고 최근 들어 권위를 굳히고 있는 'Metacritic'에선 14명의 비평가로부터 전원 100점 만점으로 1위를 기록한 영화, 그게 ‘대부’다.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얼마나 수상했는가를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임재범이나 전인권의 노래를 들으며 발성이 어쩌구를 논하는게 별 의미없는 것처럼 ‘대부’는 그러니까, 그냥 지구촌 모든 영화의 대부인 것이다. 별로 땡기지도 않았던 그 영화를 꺼내든 건 쓸 데없는 자존심도 한몫 했다. 이탈리아에 살면서 ‘대부’도 안보고 마피아를 말하고 시칠리아를 말한다는 게, 심지어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말한다는 게 왠지 구린 양심을 쿡쿡 찔리는 듯 하여 편치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게다. 그러니 그 거대한 두목을 만나던 D-day의 심경은 흡사, 수십년 기다리던 빚쟁이 앞에서 탕감할 목돈을 손에 쥔 채 작정하고 벼르는 심정, 딱 그거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컴퓨터를 켜고 외장하드를 장착시키며 들었던 마음은 기대감 대신 또 쓸 데 없는 비장함이었다. “재미없기만 해봐라”하는…



3시간의 긴 런닝타임이 끝나고...

내 감정은 재미가 있었는가의 문제로부터 이미 떠나 있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들었던 감정은 딱 하나였다. 내 자신에 대한 초라함... 이런 대단한 영화를 왜 이제서야 보게 됐나 하는 때늦은 반성류? 미안하지만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물론1970년대 초반의 영화 치곤 퍽이나 우아한 드라마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허나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제 너무도 세련된 기법으로 범벅된 영화(혹은 예술)들의 홍수속에 산다. 그리고 그 세련됨은 너무도 빠르게 퇴색하여 이내 구닥다리로 전락하고 만다. 모든 게 빠르게만 지나가는 이 시대에 남겨진 ‘대부’는 분명 철 지난 형상이며 흘러간 추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철 지난 영화를 보면서 내가 초라해짐을 느낀 건 이유가 따로 있다. 영화 속 두목에 비하면 내 인생의 스케일이 참으로 별 볼일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두목의 인생이 너무 멋있어 보였던 거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남자인건가, 누군가에게 굽신거리기 싫고 군림하고 싶은 본능, 킹콩을 비롯한 많은 영장류의 수컷들이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가 크허엉~ 울부짖으려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 영화를 봤던 지구촌 수많은 남자들은 한동안 말론 브란도를, 또 알 파치노를 그렇게 꿈꿨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위대한미덕은 ‘지구촌 남자들의 자존감에 남긴 커다란 상처’다. 두목의 강렬한 뽀대로 부터 자극받은 열등감은 오히려 그 두목에 대한 환상으로 반전된다. 이후 이 상처와 환상이라는 감정의 악순환은 영화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로 선순환 되어 머릿속에 각인된다. 그래 맞다, 영화제에서 아무리 상을 많이 받아봐야 고상한 메시지를 머리 아픈 방법으로 전달하는 영화는 금방 잊혀지게 마련이다. 영화든 현실이든 평생을 가는 기억들은 대게 본능을 자극하는 사건들이다. ‘대부’는 그래서 수컷의 본능을 자극하수컷들의 영화다. 그래서 특히 남자들의 기억에 각인된 것이다. 당장 유튜브에서 OST 메인테마를 들어 보시라. 4/4박자내에 똑같은 8분음표가 고작 11번 반복되는 동안 가을코트 걸쳐입고 서늘한 들판의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고독한 수컷의 형상이 그려질 것이다. 아 물론, 영화를 먼저 봐야한다.


https://youtu.be/odf94qQoxLk


이 영화가 그 시절의 사람들 속에서 얼마만한 스케일로 입에 오르내렸을지, 또 얼마만한 기억으로 지금까지 살아 꿈틀거리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영화 뿐이겠는가, 영웅이나 위인들이 살아숨쉬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지 형상이나 행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먼지 묻고 색이 바래도 ‘대부’의 영향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하지만 ‘대부 2’편을 보다가 중간에 껐다. ‘왜대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1편에서 다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많이 변했다. 거의 반세기 전에 활동했던 두목의 이야기가 살가울 리 없다. 그 OST도 영화도 가을의 낙엽처럼 퇴색된 것이다. 그리고 감정은 걸러내야 한다. 아무리 멋있고 우아해도 이익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조직폭력배일 뿐이다. 그걸  정도까지 미화시켰다면 둘 중 하나다, 감독이 조직폭력배 두목을 아주 동경했거나 아주 두려워 했거나… 범죄조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뭐랄까, 정의롭게 사는 것보다 가오있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조직의 가르침을 그대로 대변한, 아니변호한 느낌이다. 그것도 세번씩이나… 영화니까 이해했다. 표현의 자유를 부정할 수 없는 시대니까. 플롯의 현실감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미화됐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또다른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너무 뒤늦게 접했다는 사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절은 변했고 나도 감정에 휘둘릴 나이가 아닌 것이다. 그러던 중 최근 ‘대부’로부터 느꼈던 공허함을 채울 만한 또다른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그 영화 이야기 좀 해볼까 한다.


2008년작이다.

‘대부’와는 달리 인공조명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일상을 담은 장면에서도 자주 흔들린다. 그냥 스마트폰으로 찍은 건가 싶을 정도다. 언젠가부터 자주 눈에 띄는 일종의 '페이크 다큐(영화와 다큐의 중간형태)'다. 이건 ‘대부’처럼 조직을 미화하는 장면이없다. 그렇다고 악의적인 장면도 없다. 있는 그대로 날 것만을 보여준다. 물론 현장 생중계는 아니다. 하지만 생중계라 해도 무방하다. 배우만 갖다 썼을 뿐 나머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알고싶다 ; 나폴리 뒷골목에서는 무슨 일이?’편 정도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원래 원작 픽션 기록이 대박이란다. 그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작가가 지금도 암살 위협에 놓여있단다.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2년간 몰래 조직의 일원이 되어 직접 보고 경험한 내용들을 기록한 것이라 했다. 말하자면 잠입르뽀가 된다. 아마도 나폴리의 범죄조직인 카모라(Camorra)에 관한 내용을 이만큼 구체적으로 담은 자료도 세상에 흔치 않을 것이다. 혹시 범죄조직에 관한 영화를 두고 아직도 ‘대부’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억을 어서 속히 추억으로 전환시키길 권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시라. 영화를 보고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원작 논픽션을 구해 읽기를 또 권해드린다. 한국의 대형서점에서도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 제목은 카모라가 아니라 ‘고모라(Gomorra)’다. ‘소돔과 고모라’ 할 때 그 고모라 맞다. 타락으로 멸망한 고모라를 나폴리에 대입시킨 은유적 제목이다. 발음도 슷하다.

영화는 너댓가지 상황들이 번갈아 교차진행된다. 언급했던 대로 페이크 다큐, 벌어지는 사건들이 서로 얽힌 관계는 아니다. 그냥 나열할 뿐이다. 거기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일단한가지 상상을 해보자. 카모라에 입단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까?

나도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방탄복을 입고 총을 맞는다.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말이다. 머리박고 빠따를 쳐맞는 우리네 신고식은 신고식도 아닌 것이다. 군기가 빠졌다며 운동장 100바퀴를 돌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총으로 쏜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픽션이다. 영화는 끝부분에 놀라운 사실 몇가지를 자막으로 띄우는데 그 중 하나는 카모라로 부터 죽임을 당한 사람이 지난 30년간 무려 4천명이 넘는다는 사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2.7일에 한사람씩 죽는 꼴이다. 그 밖에 무성하던 소문들은 ‘고모라’라는 책과 영화를 통하여 결국 세상에 진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파문의 시작은 이듬해인 2009년 10만여명을 운집시켜 마피아 척결운동으로 이어졌다. 물론 마피아는 끄떡없다. 사회의 기득권층을 이미 깊숙히 물들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건 조직의 일원은 은퇴 후 조직으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사망할 경우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생계비도 지급된다는 사실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택한 선택이 물리적 폭력이 아닌 복지 시스템이라니, 조직관리의 형태가 복지제도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은 조직이 얼마나 체계적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며 이건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사업 스케일이 얼마나 방대하고 탄탄한가를 동시에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산업폐기물을 불법으로 매립, 방류하거나 그 폐기물을 시멘트와 섞어서 불량 시멘트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판매한다.

게다가 소위 말하는 짝퉁산업은 허를 찌른다. 기존의 명품을 모방하는게 아니라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진품인 양 판매한다. 헐리우드 배우인 그 유명한 안젤리나 졸리(영화에선 스칼렛 요한슨)도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 그녀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었던 베르사체 옷은 카모라가 제작한 가짜임이 뒤늦게 밝혀졌을 정도다. 나폴리 뒷골목에서 만들어진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옷 한벌이 헐리우드 최정점에 서있는 존재에게 입혀지기까지의 유통경로를 상상해 보시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놈 위에 올라타는 놈 있다더니, 앙드레김 위에 베르사체, 베르사체 위에 카모라가 있는 것이다.


최근 유럽의 공포의 대상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테러리스트는 마피아에 비하면 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테러는 여기저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뾰루지 같은 것이지만 마피아는 제도권을 숙주삼아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다. 그것도 뇌에 상주하는… 숙주의 피를 빨아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뇌에 기생하여 숙주를 조종하기도 한다. 하수인이 아니라 주인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조직 폭력배들이 있다. 하는 일이 카모라와 비슷하다. 산업 폐기물을 바다에 버리고 돈 심부름을 시키고 불량 건축 자재를 만들어 부실공사를 한다. 어? 깍두기 머리에 기지바지 입고 문신한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일까지 하나 싶을 것이다. 카모라는 조직원들이 그런 일을 직접 하지만 우리네 조폭은 명령을 받으면 무력 행사를 통해 불법을 돕는다. 물론 밤문화를 직접 관리하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보통 권력의 하수인으로 기생한다. 숙주의 뇌가 아닌 여기저기에 붙어 기생한다. 우리는 그들을 빗대어 ‘충실한 개’라 한다. 카모라와 우리네 조폭이 다른 건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런데 정말로 어이없는 것은, 우리에게도 권력의 뇌에 카모라처럼 기생하여 조종하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최순실’이라는 듣보잡 인물을 이제야 알게 된 당신, 기분이 어떠하신...

마피아나 조직폭력배가
최순실 게이트와 다른 것은
폭력의 유무일 뿐이다.

국민들이 낸 세금(혹은 타인의 돈)을 착복하고 권력을 흔드는 건 마피아나 조폭이나 최순실이나 다 똑같다. 그런 존재와 평생을 붙어 먹었던 자가 대통령을 하고 있다면… 이탈리아의 정치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 아니겠는가. 실체 불분명한 이념은 그만 들먹이자, 있는 것만 똑바로 볼 뿐이다. 이런 논제는 필시 남북의 문제도, 동서의 문제도, 진보와 보수의 문제도 아닌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이길 바란다.


“먹고 살기 바쁘니 그만하자” 말할 사람들을 위하여 잡설 몇가지 끄적여 본다(나도 먹고 살기 바쁘다). 현재 대한민국 국가부채는 드디어 1000조를 넘어섰고(2013 회계 연도 국가 결산보고서) 재정적자는 지난 10년동안 열 배 이상 증가했다. “우리도 그리스처럼 되지 않으려면 복지예산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꺼내 자료를 뒤져보라 권해 본다. 우리나라 복지예산이 얼마인지, 줄이려면 어느 부문에서 얼마를 줄일 수 있는지 직접 계산기를 두드려 보시라. 그리고 계산할 게 한가지 또 있다. 우리나라 권력층과 기업이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여 해외로 도피시키는 세금액이 얼마인지를 알아내고 그걸 법적으로 처벌하여 회수하거나 막을 수 있는 액수가 얼마인지를 계산하면 된다. 아 그리고 또 한가지, 각종 사업비리로 착복되거나 낭비된 돈이(다 양보할 테니 밝혀진 것만이라도, 하다 못해 우리들이 낸 세금 중에 최순실을 위해 쓰여진 것만이라도) 얼마인지를 찾아보고 덧셈 뺄셈을 해보시라. 계산이 복잡하신가? 쉽게 말해서 복지에 할당된 액수와 잃어버린 세금 액수를 비교해 보라는 말이다. 잃어버린 국민들의 혈세만 국고에 차곡차곡 쌓였어도, 또 기업들의 탈세만 없었어도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양육수당, 최저생계비 인상 등을 지불하고도 펑펑 남아서 국가부채마저 탕감시키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이런 계산을 직접 해보지도 않고 대한민국 국가경제를 살리는 최고의 방법이 복지예산을 줄이는 거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부패한 권력을 대부로 여기며 노예로 살아온 사람이라는 증거다. 실례로 국내의 어느 도시에서는 이전 시장이 세금 낭비, 착복, 불필요한 개발 등을 저지르는 통에 7천억이 넘는 부채를 안게 되어 모라토리엄 선언(부채 상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경계경보이며 국가적으로는 imf 시대의 외환위기와 비슷한 것)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장이 바뀌고 3년 6개월만에 모든 부채를 탕감시켰을 뿐만 아니라 각종 복지정책마저 실현시키고 있다( 무상 교복, 무상 급식, 공공 산후조리원, 저소득층 특수의료비 지원, 전국 최대 노인복지관 건립, 전국 최대 시립 종합 의료센터 건립 등). 94%라는 경이적인 공약 이행률을 실천한 이후 이 시의 재정자립도는 어떻게 됐을까? 은행이나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쓴 사람의 마이너스 통장처럼 바닥으로 추락했을까? 정반대다. 재정자립도 전국 5위를 기록한 것 뿐만 아니라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회 여러 기관의 평가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이는 복지정책의 문제가 능력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지의 문제라는 걸 증명한다.


국내 뿐 아니라 유럽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사태 이후 후폭풍을 얻어 맞을 가장 유력한 국가로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언급됐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만일 그 세 나라의 공통점이 과도한 복지예산의 문제만을 안고 있었다면 충분한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 나라들의 복지예산은 권력층의 부패로 낭비되는 돈에 비하면 껌값에 불과했다(공중파에선 이런 자료를 뉴스로 내보내질 않는다. 왜일까?).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얼핏 과도해 보이는 복지를 실현하고도 여전히 굳건한 이유는 권력층의 부패, 혹은 그로 인해 낭비되는 돈이 적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낭비될 돈 아껴서 복지로 재투자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OECD 가입국은 총 34개국이며 국제 투명성 기구가 올해 발표한 부패지수 순위(1위는덴마크이며 숫자가 작을 수록 청렴국)에 의하면 그리스 31위, 스페인 26위, 이탈리아 32위, 대한민국 27위(10년전 23위)이다. 이래도 모르겠는가, 망하거나 휘청거리는 나라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003년 대통령이 된 이후 200여만명의 절대빈곤자들을 구하고도 뒤늦게 부패스캔들로 곤욕을 치뤘던 브라질의 대통령 룰라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절대빈곤자들을 구원했으며 어떠한 이유로 곤욕을 치뤘는지를 보면 국가의 흥망이 비슷한 맥락으로 전개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건 비단 위에 언급한 나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세계사가 모든 걸 증명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권력의 부패'라는 공통된 코드로 멸망의 전철을 밟았다. 나라를 구하고 싶다면, 또 그렇게 창조경제를 하고 싶다면 혈세낭비를 중단하고 당장 사회정의를 먼저 실현시켜야 한다. 그게 진짜 창조경제이고 먹고 살기 바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지구촌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세계 10대 범죄집단의 공통점이 있다. 정치적 소외지역에서 생성되고 제도권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실이다. 나폴리도 그렇고 “아따 행님!” 외치는 전라도 조폭도 다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계급과 부 평등에 대한 희망을 잃으면 시스템을 부정하는법이다. 하다 못해 이제는 카모라마저 복지 시스템을 도입하여 조직을 관리하고, 그 부패했다는 이탈리아도 말할 권리를 빼앗진 않는다. 다 그럴 만한이유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있는 것이다. 이건 시대의 흐름이고 막을 수도 없다. 우리도 이제 평등으로 가기 위한 시스템을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안되면 대부가 되고 싶은 욕망에 취한 인간들의 노예로 살게 될 뿐이다.


국가로부터 대접 한번 제대로 받아본 일도  없이 죽어간 300여명의 아이들과 가족들, 그 어처구니 없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하는 국가에서 고작 농민 한사람이 물대포에 맞았다 한 들, 누가 돈을 얼마나 착복했다 한들 진상이 밝혀지겠는가? 또 결국 “먹고 살기 바쁘니 그만하자”는 소리가 나올 것이고 그러다 또 어느날 또 다른 기생충이 출현하여 냄비(!)에 불을 집힐 것이다. 이 대부와 노예의 무한 서클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대부는 추억의 대상이고 타락으로 멸망한 고모라는 나폴리의 징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대한민국을 고모라와 나폴리에 비교할 수가 있느냐 하소연 하고 싶으신가, 그래서 한가지 계산을 또 해드린다. 위에 언급한 대로 나폴리에선 지난 30년간 2.7일에 한명씩 총에 맞아 죽었다. 계산기를 두드리니 64.8 시간만에 한명씩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할까? 지난 한해동안 0.38 시간마다 한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폴리에서 한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170명이 자살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무시무시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인구비율을 적용시켜 다시 계산해 보시기 바란다.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될 것이다. 물론 통계라는 것이 사회적 문제를 완벽히 설명할 순 없는 것이다. 허나 지난 11년간 지구촌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가 나폴리를 두고 불쌍한 도시라고 여길 자격은 없는 것이다. 개인적 감상을 떠나서 정말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나폴리 뿐 아니라 이탈리아가 정치적으로 아주 심각하게 부패했다는 것은 해외언론에 기본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누구가 공감할 것이다. 뉴스를 볼 것도 없다. ‘비정상회담’이라는 국내 예능 프로에 나오는 알베르토는 기회만 되면 자국의 정치적 부패를 깐다. 국회위원들이 받는 특혜가 어떻고 그들의 탈세가 얼마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까발린다. 심지어 정치인이 마피아와 연루됐을 가능성도 종종 이야기한다. 기생충이 숙주의 뇌에 기생한다는 걸 증언하는 것이다. 저러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외압을 겪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산 증인이다. 자국의 권력부패를 그렇게 까대던 알베르토는 요새 어떻게 지낼까? 그는 이제 자국에서 출세는 커녕 온전히 지내기조차 글러먹은 것일까? 근데 이게 왠 걸, 그는 며칠 전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으로부터 국가공로 훈장을 받았다. 이탈리아 대통령이 준 거란다. 명분이 뭔가 해서 봤더니 ‘문화적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데 기여’란다. 아무리 대통령인 마라텔라나 총리인 렌치가 좌파 민주당 출신이라 해도 현 집권 총수들이다. 그들의 재임기간에 이탈리아의 권력비리가 들먹여지는 건 밑져야 본전이며 그 유쾌한 일이 되진 않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보자. 누군가가 이탈리아 방송에 나와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부패를 다 까발린다면 어떻게 될까? 훈장은 커녕 국정원의 감찰대상으로 물망에 오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 해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가 아무리 부정부패가 심하고 마피아에 놀아날 지언정, 국민의 말할 권리마저 빼앗는 나라는 아닌 것이다.

국가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국민들에겐 말을 함부로 못하게 하는 시스템, 세상은 그걸 ‘전제정치’라고 부른다. 전제정치의 치명적 단점은 권력자의 도덕성에 태클을 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뚜껑열린 유럽에선 200여년전 부를 몰아냈고 우1919년 임시정부 헌법 첫 줄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구를 박아넣었다.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민주'라는 말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고 '공화국'이라는 말은 군주나 세습된 권력이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면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대통령은 국민을 통치하는 인물인가? 전혀 아니다. 대통령의 통치의 대상은 국가이지 국민이 아니다. 국민은 보호받을 대상이지 통치당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국민이 뽑는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심부름꾼이고 대리인일 뿐이라는 뜻이다. 민주공화국 시대의 대통령은 그러니까… ‘대부’가 되면 안되는 것이다. 대부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국민이 대부를 그리워하는 걸 넘어서 환생시키려 하면 더 큰 문제다. 시대는 엄청난 속도로 바뀌는데 왜 우리 주변엔 낡은 시스템의 대부를 떠올리며 노예이길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 영화 ‘대부’가 아무리 대단한 영화라 한 들, 그 영화가 2016년 신작영화로 개봉됐다면 어떤 평가를 받겠는가? 뭐 이런 구닥다리 영화가 있냐며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개봉관에서 간판을 내릴 것이다. 추억할 것이 따로 있고, 비전 삼아야 할 것이 따로 있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라.


민주가 아닌 군주인 상황, 공화국이 아니라 사조직 왕국인 상황, 제도권과 범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상황, 기생충이 뇌에 들어앉아 숙주를 조종하는 이런 상황, 고모라가 되기 직전인 이런 상황을 보라. 하지만 이게 단지 어제 오늘만의 일이었을까? 박근혜나 최순실이 하야되거나 처벌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은 전혀 아니다. 숙제는 여전히 남는다. 문제는 박근혜 최순실이 니다. 문제의 본질은 바로, 그들이 ‘대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진짜 대부는 박근혜도 최순실도아닌 제3의 인물, 혹은 단체일 수도 있다. 그 대부의 진짜 실체가 누구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국민을 하수인으로, 노예로, 혹은 종교적 제물로 바쳐도 마땅한 개 돼지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휴머니티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후, 그 자리에 앉게 될 사람은 결코 대부여선 안된다. 중세의 성직자도 안된다. 고대의 파라오도 안된다.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부가 아니라 ‘리더’다. 군림하는 대부가 아니라 함께 하는 리더여야 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온다. 풀 한포기 없을 것 같은 거친 광야의 역사 속에서도 기회는 온다. 깨어있는 국민들이라면 진짜 리더를 알아볼 것이다. 프랑스의 한 정치학자의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나, “정치적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경고는 그래서 여전히 뼈아프다. 그 현자들의 말이 맞다면, 어쩌면 최순실 사건의 주인공은 타락한 그들이 아니라 그 타락을 알고도 모른 척, 나만 아니면 된다 여겼던 우리들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들의 선택이다. 모른 척 방관하는 순간, 또 다른 최순실을 만들어낼 것이고 또 다른 대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은 그들이 만든 국정교과서를 먹고 자랄 것이다.


잊었는가? 박근혜는 어디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뽑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대부를 떠나보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어머니 (MIA MADR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