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 난해함,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 《올해의 작가상 10년의 기록》
불편함, 난해함,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 《올해의 작가상 10년의 기록》
기간 2022-10-28 ~ 2023-03-26
주최/후원 국립 현대미술관, SBS 문화재단/LG전자
《올해의 작가상 10년의 기록》 리뷰 1편에서는 지난 10년간의 올해의 작가상을 함께 했던 관람자로서, 이번 전시가 나의 20대 예술 감상의 아카이빙과 같았다는 소회를 밝혔다. 지나간 전시들이 감상자인 나에게는 좋은 기억과 기록이 되어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해의 작가 상⟫의 모든 전시가 대중의 박수 속에서 성황리에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올해의 작가상은 자주 도마 위에 오른 생선과 같았다. 상이 가지는 권위만큼 자주 전시나 상에게 부여되는 타당성에 대한 질문이 수시로 제기되었다. 더불어 관람자들은 동시대 미술을 따라다니는 불편함과 난해함이라는 꼬리표에 대해서도 수도 없이 의문 던져왔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다. 그 질문 이면에는 ⟪올해의 작가상⟫ 이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행사이지만, 결국은 소수의 예술계 인사들이나 즐기는 파티가 아니냐는 거친 시선들이 동반되었다.
그리하여 《올해의 작가상 10년의 기록》 두 번째 리뷰에서는 전시 방문 이후 불편함, 난해함,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난 10년간 전시들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그건 사실이 아닐 테다. 편안하고 안락한 작업은 동시대 예술의 날카로운 반짝임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르기도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불편한 예술들이 많았다. 꼭 그래야겠냐 묻고 싶기도 했다. 작가들은 자주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는 시선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자연스럽게' 배제하고 있는 사각지대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곤 했기 때문이다. 많은 동시대 예술들이 그렇듯, ⟪올해의 작가상⟫ 작가들 역시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사회 문화적으로 단단하게 구조화되었는가를 밝혀내며 우리의 신체와 생각 곳곳에 새겨져 있는 기성의 감각들에 대하여 물음을 던져왔다.
불편한 사유는 때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낡은 사유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도와주는 능숙한 수선공이 되어준다. 예술이 주는 불편함은 사회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여기라고 가르친 것들을 비판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게 도와주는 안경이 되어, 배제되어 있던 영역, 그리하여 가시화되지 못한 것으로 분류된 것들을 밝은 자리로 가져온다. 인간은 편안하게 여기는 영역을 벗어날 때, 불쾌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동시대 예술은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대상이 되는 것이겠지만, ⟪올해의 작가 상⟫의 불편함 작업들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다시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난해함 역시 불편함과 비슷한 원리로 변호하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는 편안하게 지각되는 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규범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주목한다. 그리고 주목받지 않던 곳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한다.
사각지대를 감각한다는 건 익숙지 않기 때문에, 이 사각지대를 보여주는 아이디어 앞에 우리는 자연히 난해함을 느낀다. 우리는 이 사각지대를 감각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사각지대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면 그곳은 사각지대가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사각지대는 지배적 문화와 가치관이 포섭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이를 다루는 현대 예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의 욕망이나 정체성을 지배적인 가치에 맞추는 건 쉽다. 파도에 모래알이 휩쓸려가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쏟아져 내려오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에너지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예술은 편안하지 않고, 잘 모르겠고, 난해하게만 다가오는 것이다. 고전 미술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미'의 기준을 따르며 제작되어 왔지만 현대 미술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난해함' 속에 현대미술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올해의 작가상'를 향한 비판의 검 중에서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검도 있었다. 불편함이나 난해함과 달리 이 비판은 주로 예술계 안에 있는 이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까 감히 추측한다. 물론 예술계 자체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면 이 전시가 그들만의 잔치든 아니든 크게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비판을 곱씹으며,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이란 누구인가?를 묻고 싶다. ‘그들’이란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소수의 예술가들, 그리고 그들을 비평할 ‘자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권위 있는 이들만을 지칭하는 것일까? 나와 같이 작가는 아니지만, 매해 전시장을 들르고,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전시를 구경하는 이들은 이 리그에 참여한 자가 아닌가.
나 역시 이 축제를 ‘그들만의 리그’라고 비판하는 이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상이 과도한 한 개인 작가에게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아주 바람직하다고 보긴 어려울 수 있으며, 예술 작품이 소수의 권위 있는 평가자들에 의하여 평가되고, 그들의 평가에 가치가 결정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일 테다. 그러나 나는 되려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던지는 이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렇다면 올해의 작가상이 '모두의 리드'가 되기 위하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만의 리그는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모두의 리그가 되는가? 세상에 모두의 리그가 되는 것이 있나? 그리고 굳이 모두를 위한 리그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연예대상 같은 대중문화 혹은 소비성 문화가 되기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모두의 리그’처럼 보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나.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홀로 고민할 때면, “그들만의 리그”라는 단어만큼 책임감 없고 섬세하지 못하고 손쉬운 비판도 없다 싶을 때가 있다. )
물론 전시의 선한(?) 취지가 실제 돌아가고 있는 현상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만, 이 전시와 전시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조금의 보탬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전시를 조금 더 고운 시선에서 봐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동시대 예술은 기존 제도에 대하여 의문 던지는 작업을, 그리고 일상의 맥락에서 탈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 의하여 빚어진다. 그들은 특별한 감각과 상상력을 가지고 자신의 고유한 사유와 상상들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이 작가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예술적 생산물을 관람자들과 공유하기를 소망한다. 올해의 작가상은 고르고 또 골라 나름대로 엄선한 작가들의 작업물을 다양한 대중들에게 선보여왔다. 관람자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업 앞에서 조금 다른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고, 일상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연례 행사와 같은 '올해의 작가상'이 그 나름의 물음과 고민 속에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ps. 이중섭 컬렉션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던 저녁의 국현. 운 좋게 문화가 있는 날을 맞춰 왔더니 여기도 저기도 사람이 많다. 뭐 이러나 저러나, 많은 사람들의 삶의 예술의 자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
*《올해의 작가상 10년의 기록》관련 첫 번째 글을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