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정연두 개인전 ⟪백년 여행기⟫ 전시 비평
한창 바쁜 시기에 새벽을 새며 읽었던 책들이 있다. 이금희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 그리고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분명 잠을 자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책에서 손에서 떼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책이 남긴 여운이 내내 남아있었다.
두 책 모두 하와이 사탕 수수 농장에 도착한 하와이 이민 1세대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주인공들은 하와이가 “돈을 쓰레받기로 쓸어 담고 나무에는 옷과 신발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곳이라는 말에 속아 곧 신랑이 될 이들의 사진 한 장만 보고 하와이로 떠난다. 당대 이민자들은 팔려 가듯 미국 땅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극심한 뙤약볕, 채찍을 휘두루는 농장 주인, 그리고 텃세를 부리는 타국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극한의 상황을 견디며 타지에 뿌리를 내리고 미국 사회에 적응하고자 했다. 더불어 자신들끼리 한인 사회를 이루고 조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수호하고자 독립 자금을 모으고 그것을 조선으로 조달하였다.
<시선으로부터>의 주인공 시선 역시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타지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이나 군인들의 빨랫감을 세탁하며 삶을 연명한다. 낯선 땅에서의 삶을 연명하던 시선은 우연히 99번 국도에서 미술계의 거장을 만나 교육의 기회라는 말에 혹하여 자신을 내던지듯 그를 따라 독일로 떠난다.
소설을 통해 만나는 역사는 긴 선에 포함된 개개의 미세한 점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작업과 같다. 크고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이야기는 사소해진다. 칠십 평생을 부단히 살아낸 노인의 삶 속에는 감히 언어로 다 전수될 수 없을 만큼 깊고 광활한 명철이 담겨있지만,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이 개인은 하나의 점으로도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나 소설은 늘 그렇듯-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혀있는 숨겨진 개개인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때로 이야기는, 그러니까 예술은 살아가는 저마다의 삶에 주목하여 거대한 시간 개념으로는 다 포괄할 수 없는 개개의 지난한 삶의 여정을 조명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정연두의 작업 역시 ‘멕시코 이주’라는 단어 속에 켜켜이 쌓인 개인의 흔적들을 발굴한다. 그는 에네켄 농장에서의 삶을 시작한 멕시코 이주 1세대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후손의 삶을 “이주”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다층적으로 풀어낸다.
전시의 제목은 “백년 여행기”다. "백년 여행기”란 1905년 시작된 한인들의 멕시코 이주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정연두가 주목한 이주는 단순히 가난하고 고되었던 당대 조선인들의 삶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의 초점은 단체적인 이주가 시작된 100년 전 과거로부터 자의나 혹은 타의에 의해서 국경을 넘나들며 삶의 기반을 바꾸는 현대의 이주에 맞춰져 있다. 이번 전시는 이주로 인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었던 이들과 그들의 후손 이야기에 집중하며 '이주'라는 행위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보다 세밀하게 다룬다.
전시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보면 전시관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설치물 <상상곡>을 만날 수 있다. <상상곡>은 우리 생태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거대한 열대 식물 오브제들이다. 천장 곳곳에 달려 있는 오브제들 사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언어들이 떠다닌다. 화자를 가늠하기 어려운 다양한 목소리가 전시장에 울려 퍼진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외국인들이다. 작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이국적인 식물의 모형들 사이에 울려 퍼지도록 설계하였다.
작품이 설치된 공간에서면 타국에 여행을 가서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옆 테이블에 앉은 현지인들의 대화 소리를 엿듣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한 평생을 조선에 살던 사람들이 멕시코에 도착한 순간 느낀 그 이질감과 낯섦을 고스란히 표현하고자 한 듯 보였다. 아메리카라는 대륙에 대한 지식조차 전무하였던 시절, 거대한 바다를 건너 타지에 도착한 순간, 사람들은 얼마나 긴장되고 떨렸을까.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육지에 발을 내린 순간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설렜을까. <상상곡> 이 설치된 공간에서는 이주가 동반하는 낯섦과 설렘으로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타지 생활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본격적으로 전시장에 들어서면 곧 2채널 영상 작업인 <세대 초상>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는 기다란 두 대의 LED 대형 패널이 마주 보고 설치가 되어 있다. 각각의 화면에서는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의 모습이 재생된다. 화면에는 초기 이민 세대를 살아낸 노인들과 젊은 후손들의 모습이 함께 재생이 된다. 90세가 넘은 이민 2세대 할아버지부터 10대의 어린 손녀까지, 말 그대로 이 작업은 '세대'를 담고 있는 초상이다.
영상 속 인물들은 정지한 듯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인물들의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도록 이들의 모습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영상을 보고 있다 보면, 각 세대 간의 이질성이 확연히 느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과연 이들을 '이주민'이라는 하나의 어휘로 정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인물들의 미세한 얼굴과 표정, 그리고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이들의 관계를 둘러싸고 미묘하게 존재하는 그 '다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비록 유전자로는 얽혀 있으나, 서로 다른 신념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각 세대들의 이질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특히 후손들은 외모부터 1세대 조선인들과는 크게 다르다. 초기 이민자들은 성비 불균형의 문제로 멕시코 여성을 만나거나 또 다른 이민자들을 만나 결혼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외모’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보다 더 “멕시코 사람” 같다. 각 개인에은 살아가는 사회가 주는 분위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한국인 여행자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듯, 후손들은 조상들과 달리 그 사회에 오래 산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멕시코인 특유의 분위기를 품고 있다.
이민 1세대들이 낯선 공간에서 그들이 떠나온 고향의 문화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했다면, 이후 세대의 자손들은 기존 문화권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화되어 살아갔을 것이다. 그들은 멕시코 문화의 더 중심부에서 자라며 더 깊이 그 문화를 흡수하였을 것이고, 윗 세대들에 비하여 '타자'로 살아간다는 의식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비록 같은 공간에 살았으나 서로 다른 문화에서, 각기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다름’은 그들의 외모와 움직임, 그리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속을 통해 고스란히 배어나온다. 그리고 정연두의 카메라는 이 미묘한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세대 초상>을 지나 다음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전시장 전체에 울려 퍼지던 거대한 음악 소리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전시장에는 3채널 공연 영상인 <백년 여행기>가 재생된다. 가로 8미터 크기의 거대한 스크린에서는 에네켄 농장을 비롯해 작가가 멕시코에서 찍어온 한인들의 8.15 기념식, 3.1절 기념행사, 멕시코시티, 메리다나, 다른 도시들의 풍경 등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재생된다. 영상 이미지들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동안 한국의 판소리와 일본의 기다유 분라쿠, 그리고 멕시코의 마리아치 공연 음성이 차례로 울려 퍼지며 영상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거대한 3채널 스크린은 사람들은 편안하게 누워서 감상하기 편하도록 살짝 기울여져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빈백에 자리를 잡고 누워서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음악을 들으며 이국적인 멕시코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을 감상할 때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영상이 이민자들의 삶 속을 함께 여행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백년 여행기>는 극적인 기승전결로 완성된 서사를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다. 필자의 경우 현대미술을 전공했음에도 미술관에서 영상 작업을 끝까지 보는 경우가 드문데, 이 작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하게 되었다. 휴일에 미술관을 방문한 터라 사람이 꽤 많았음에도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사람 없이 모두가 함께 음악에, 그리고 화면에 골몰하며 작업을 감상했다. 영상이 마무리되고 난 이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흥미롭다’라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영상이 주는 여운이 깊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한 번 더 영상이 재생되기를 기다리는 관람자들도 있었다.
<상상곡>에서 시작된 멕시코의 이주 여정은 열대 식물들이 설치된 공간에 안락하게 누워서 판소리를 들으며 마무리된다. 이 이질적인 여정에 가만히 몸을 맡기면, 100여 년 전 시작된 이주의 여정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향해 가고 있을까 자연스레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는 마치 큰 붓으로 거칠게 벽면을 칠하는 작업과 비슷해서, 그 안에 촘촘하게 존재하고 있는 세밀한 개인의 서사를 주목하기 어렵다. 고향을 떠난 1000명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다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제물포항을 떠난 1200명의 조선인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우리는 쉬이 그들의 후손 역시 부모 세대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갈 것이라고 예측하곤 한다.
그러나 정연두는 이주의 역사라는 이 거친 붓질 속에서 꿋꿋하게 존재하고 있는 개인을 세밀하게 발굴하는 듯하였다. 그가 보여주는 이민자들은 한국인 같으나 한국인 같지 않은, 실은 어딘가 다르게 느껴지는 외국인들의 모습이었다. 실상 우 리가 상상한 1세대의 '이주민'과도,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의 '동포들'과도 어딘가 다른, 그곳에서 나름의 뿌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가까웠다.
지금 이민자들의 삶은 제물포항을 떠난 일포드선을 타고 조선을 떠난 이들이 겪은 지난함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멕시코에 더 깊숙이 동화되어 멕시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한국이란 한류 문화의 중심이 되는 한국 드라마나 음식, K 팝 같은 것들일 수 있다. 아니면 우리 역시 거리를 두고 사는 ‘전통적인’ 것들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1세대가 경험했고 보존하고자 하던 일상 깊숙이 박혀 있는 ‘한국인들’의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어쩌면 이주란 그런 것일지 모른다. 멕시코의 강렬한 햇살 아래 튼튼하게 자라는 백년초가, 난류를 타고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며 ‘조선의 백년초’가 되었듯_ 낯선 공간에 이식된 생명체가 그 땅의 식물이 되어 존재하듯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뼛속까지 ‘멕시코인’들로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후손까지 조명하고자 하는 정연두의 이번 전시는 너무 한 개인에게 침몰하지도, 그렇다고 시멘트를 붓듯 디테일을 지워버릴 정도로 거시적이기도 않는 선에서 세밀하고도 다층적인 이야기들을 전달한다.
정연두는 예술이 가장 잘 하는 일을, 가장 잘 하도록 전시를 구성했다. 무심히 놓여 있는 조각들과 덤덤히 울리는 목소리는 예술이라는 섬세한 언어로 치환되어 관객들에게 사유의 단초를 건넨다. '이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요즘 예술이 어떤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전시장을 방문해 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