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난의 개인전: ⟪시트콤 <그 옥수수> 에피소드 01⟫
나난, ⟪시트콤 <그 옥수수> 에피소드 01- 즐거운 나의 옥수수⟫
Nanan, Sitcom 〈The Corn〉 E01. Corn Sweet Corn
2022.09.03-2022.10.02. 서정아트 강남.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세계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공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는 그 어떤 때보다 환경에 대한 이슈가 뜨겁다. 오죽하면 MZ 세대의 특성이 일상 속 친환경 실천이라고 할까. 요즘은 일종의 소비 트렌드로서도 ‘친환경’ 키워드가 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은 내가 10대때 가지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듯싶다.
환경 문제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GMO 문제이다. 그리고 옥수수는GMO의 대표주자격 작물로 잘 알려져 있다. 요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미국산 옥수수가 대부분 유전자 조작을 거쳐 재배되었다는 지식 정도는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옥수수’라는 단어는 '허기를 달래는 간식'보다는 환경이나 인류를 위협하는 부정적인 ‘작물’로서의 인식이 더욱 강하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옥수수는 ‘기후 변화를 비판하는 작물’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로 누군가가 농사를 해서 보내준, 혹은 우리 땅에서 잘 자라난 옥수수를 접한다. 옥수수는 우리의 삶에 아주 밀접하게 자리 잡고, 일상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공허한 마음을 해결하는 심심하고 건강한 간식거리가 되어준다. 이렇듯 일상 속 옥수수는 타인을 생각하는 ‘애정’의 표현이자, 일상의 ‘추억’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옥수수를 예술 ‘작업’으로 삼은 작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난 개인전, ⟪시트콤 <그 옥수수> 에피소드 01- 즐거운 나의 옥수수⟫
나난 작가는 지난 2019년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 작업을 개인 SNS 계정에 업로드했다가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옥수수란 우리의 건강이나 생태계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위트 있고, 또 유머러스한 작물이자, 지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따뜻한 작물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옥수수가 더 많은 지구에 살아가는 더 많은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함께 담아 개인전을 꾸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작품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명작 중에서도 꽤나 잘 알려진 명화로 꼽힌다. 삼십 년 남짓 살아오며 무수히 많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패러디를 보았지만,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만큼 반짝이고 시선을 끄는 작업은 없었다. 작가의 작업이 SNS에 공개된 이후 원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소유한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위스 갤러리는 공식 계정에 작가의 작업을 공유했다. 우리에게는 YBA로 잘 알려진, 영국의 사치 갤러리 인스타그램 역시 그녀의 작업으로 메인 페이지를 장식했다. 현재 이 작업은 네덜란드의 유아 미술 교육에 활용되기도 한다고 하니, 재치있는 한 장의 작업이 가진 파급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SNS에서만 볼 수 있던 작가의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가 논현동 서정 아트 갤러리에서 오프라인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전시장에서는 벽면 한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와, 그 옥수수들의 시리즈 버전인 크고 작은 다른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옥수수밭 풍경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 연작을 보다 보면, 각각의 옥수수 머리 부분에 있는 각기 다른 색상의 머리 두건을 볼 수 있다. 머리 두건은 단순 ‘손수건’이 아닌, 천 위에 작가가 직접 그린 옥수수밭의 그림이 들어있다. 옥수수밭 그림은 하나의 옥수수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자라났는지를 보여주는 역사화와 같다. 작가는 괴산의 옥수수밭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다채로운 옥수수밭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자급자족 시대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소비하는 먹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소화기관에 안착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무지하다. 그러나 작가는 괴산의 옥수수밭 풍경 연작을 통하여, 하나의 옥수수가 우리 앞에 놓이기까지 어떤 온도와 바람, 그리고 햇살과 달빛을 지나왔는지 속삭인다. 그녀가 그린 옥수수밭의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뜨거운 태양을 견디며, 그리고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무럭무럭 자라온 옥수수들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옥수수밭 풍경화는 붉은 노을빛을 한 몸으로 받아들이고, 밤새 반짝이는 달과 별 아래에서도 꿋꿋이 자라가며 우리의 식탁 앞에 오른 수많은 먹거리들의 역사다. 참으로 우리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음식이란 1년 간 밭에서 땀을 흘리며 자연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농부들의 노고와 애정의 결과물일 것이다.
Corn art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 옆에 팝아트, 개념미술, 그리고 동시대 미술을 패러디한 popcornart, cornceptual art, corntemparary art라는 텍스트 작업이 전시되어 있다. 텍스트를 위트 있게 변형한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작업이다.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큰 특징으로는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을 꼽을 수 있다. 개념 미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이고 때로는 사변적인 생각과 개념 자체를 예술의 한 분야로 다루는데, 그녀의 corn art는 아주 물리적이고, 또 대중들이 쉽게 감각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개념 미술 혹은 동시에 미술과는 정반대 선상에 있는 듯 보인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옥수수 향, 고소한 팝콘, 그리고 경쾌한 음악.
전시를 방문한 관객들은 ‘시각’ 뿐만이 아닌 후각과 미각, 그리고 청각으로도 다채로운 자극들을 느낄 수 있다. 전시장에 발을 디딘 순간, 가장 먼저 다가오는 자극은 '옥수수 냄새'다. 관객들은 전시장 안에서 은은한 옥수수 향과 함께 작가의 작업을 관람할 수 있다. 작가가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옥수수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옥수수 향 디퓨터를 전시장 곳곳에 배치해기 때문이다. 옅은 옥수수 향은 옥수수밭을 구경하면서도, 팝콘 앞을 서성이면서도, 그리고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들을 구경할 때도 은은하게 우리의 후각을 (그리고 때로는 배고픔을) 자극한다.
전시장 한 편에서는 팝콘을 판매하고 있다. 전시를 방문한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팝콘을 구매하여 먹거나 선물할 수 있다. 이 판매용 팝콘의 수익은 전액 국제 옥수수 재단에 기부된다. 국제 옥수수 재단은 '옥수수 박사'로 잘 알려진 김순권 회장이 아프리카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운 재단이다. 이곳은 주로 품종을 개량한 옥수수를 통하여 가난과 기아 문제를 겪고 있는 제3세계 국민들이 허기로 목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한다.
전시는 ‘옥수수’를 위트 있게 활용하는 작업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계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까지 손을 뻗는다. 작가는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거나, 식량 위기로 굶주리는 아이들을 보여주는 대신, 재치 있는 작품과 '전시장에서 맛보는 팝콘'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며 세계 시민으로서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에 대하여 사유하도록 돕는다. 과연, 나난 작가스러운 발상이다.
팝콘 봉지 맞은편에는 옥수수밭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영상 근처에서 흘러나오는 가볍고 경쾌한 음악은 관람자들이 산뜻한 마음으로 전시를 구경할 수 있도록 돕는다.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전시장에서 옥수수밭 소리를 녹음한 음원을 재생하려 했으나, 옥수수밭의 소리가 전시장 전반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것 같다고 느낀 작가가 가벼운 음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보다 산뜻한 마음으로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작가의 배려가 엿보인다. 단순히 자신이 생각한 콘셉트를 고수하기보다 전시를 관람할 관객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선택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옥수수”들”
누군가에게 옥수수는 동네 친구들과의 추억이 담긴 간식이 될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혹은 무수한 수고와 애정이 담긴 작물이 되기도 할 수 있다.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우리네 어른들에게는 옥수수란 가족들의 허기를 달래는 유용한 작물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에게 옥수수란 지인에 대한 감사과 사랑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어서일까, 전시장의 분위기는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전시를 어떤 형용사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관객과 가까이서, 관객을 생각하는 ‘따뜻한’ 전시라는 단어 이외에 더 명확하게 그 전시를 묘사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전시의 메인이 되는 한 점의 작업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고소하고 담백한 간식에 대한 고마움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감사한 마음은 따사로운 한낮의 오후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위트 있는 작업이 되었다. 가까운 이웃을 챙기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대한 감사가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하나의 사진으로, 그리고 괴산 옥수수밭과 김순권 교수의 초당 옥수수까지 이어져 오늘날 그녀의 첫 개인전을 낳았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고소한 옥수수 냄새와 관객을 생각하며 고른 경쾌한 음악까지, 그녀의 작업은 유쾌한 오후를 보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아쉽게도 서울에서 한 달만 진행되었던 그녀의 전시가 부산 서정 아트 센터에서 연장되어 진행된다고 한다. 11월 5일부터 11월 19까지. 놓치지 않고 방문하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