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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Oct 17. 2022

부드러운 기계의 대가, 최우람<작은 방주>.

욕망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에 관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우리나라의 관람자들은 "자유롭게" 작품을 보고 듣고 느끼라는 말을 낯설게 느낀다. 아마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검열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미술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쉽게 위축이 되는 이유도 문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무언가 그럴싸한 정답을 찾아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한 것 말고 아주 정확한 답이 존재할 텐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짜증스럽지만, 자기가 작품 하나 이해 못하는 교양없는 사람이라는 느낌도 역시 결코 달갑지만은 않다. 


정말 괜찮으니 "자유롭게 감상해보세요. 그리고 자유롭게 작가의 의도를 해석해보세요!" 라는 지침이 주어져도, 우리의 내면은 좀처럼 평온한 감상으로 몰입하기 어렵다. 작가의 의도를 곡해하진 않을까, 너무 개인적인 해석인 것은 아닐까, 작품과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감상인 것은 아닐까_ 끊임없이 자기 검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도 '자유롭기만 한' 감상자는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다. 그러나 공부를 마치고 예술과 아무 관련 없는 일을 하며 먹고 살고 있는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술을 삶의 영역에 더 가까이 들여놓을 수 있는 한 가지의 길이란 '내가' '나의 살아온 삶의 흔적을 통하여' '나만의 시선으로' 오롯이 전시를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립 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의 [작은 방주]







최우람, <작은 방주>, 2022.


수업이 없는 평일의 오후, 최우람 작가의 작은 방주를 만나기 위하여 일찍이 집을 나섰다. 국현 서울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과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평일 점심의 전시장 모습인지 의심스러웠다. 입구에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줄을 서 있었고, (물론 이중섭 컬렉션의 힘이 컸다!) 도슨트 투어가 시작되자 도슨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도슨트를 둘러싸고 전시를 감상했기 때문이다. 2:30에 시작되는 최우람의 <작은 방주> 퍼포먼스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코로나 전에도 이렇게 붐비는 평일 미술관을 경험한 적 없었다. 가히 세계적인 작가 최우람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최우람, <작은 방주>, 2022.


최우람의 방주는 우아하다. 대부분의 최우람 작업들이 그렇듯, 기계가 '감히' 기계스럽지 않게 움직이다. 기계들의 몸짓은 마치 유기체의 움직임처럼 부드럽고, 우아하고, 잔잔하다. 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무용 전공자들의 정교한 몸짓이 떠오른다. 



'방주'란 무엇인가. '방주'란 멸망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주를 밖은 이미 위험 천만한 세계다. 방주를 흔드는 것은 목숨을 위협하는 '재난'이다. 그럼에도 그의 방주는 한결같이 우아한 자태를 고수한다. 마치 호텔 인피니트 풀장 위를 유유히 떠있는  플라밍고 튜브처럼 말이다. 



최우람, <작은 방주>, 2022.


퍼포먼스가 시작된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배는 한시도 쉬지 않고 흔들린다. 외부 세계는 점차 긴박한 상황이 되어 간다. 위기가 정점에 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우람의 방주는 파도에 맞춰 춤을 춘다. 혹은 '춤을 추는 듯' 보인다. 방주는 외부의 힘에 부딪히며 이리저리 흔들리나, 동시에  세차게 부딪히는 물살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장엄한 움직임을 지속한다. 


작가의 방주는 인간들이 세상과 부딪히며 흔들리고 스러지고 넘어지는 모습을 닮아있다. 세차게 방주를 뒤흔드는 물살 속에서 어떻게든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삶은 거센 물살을 가르며 장엄하고 섬세한 춤을 추는, 최우람의 '작은' 방주와 같다. 만약 우리의 생을 방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침몰하지 않기 위하여 고군분투 하면서, 힘을 주고 풍파를 버텨내는 존재들일 것이다. 닻은 이미 부러졌고, 풍파는 점점 심해지기에 어떻게든 침몰하지 않기 위하여 기를 쓰고 있지만, 때로는 이 모든 게 '춤을 추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은 존재들, 그리하여 그 모든 동작을 예술이 되게 만드는 존재들 말이다. 




최우람, <닻>,  <천사>, 그리고  <무한 공간>


'작은 방주'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에는 방주를 제외하고도 구경할 수 있는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그 중에서도 이미 끊어져 제 기능을 못하는 듯 보이는 <닻>, 날개를 늘어뜨린 채 매달려 있는 <천사> 그리고 끝없이 욕망을 쫓는 인류를 비유한 ‹무한 공간›에 주목하고자 한다. 



왼쪽: 최우람, <천사>, 2022. & 오른쪽: 최우람, <무한 공간>, 2022.



닻이란 배를 한 곳에 떠있거나 멈춰있게 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끊어진 닻은 배를 단단하게 고정시킬 수 없는, 무용한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그 무용한 닻이 방주의 측면 벽에 유유히 설치되어 있다. 


닻의 반대편에는 날개는 있으나 날개를 잃은 듯한 천사상이 걸려있다. '천사'는 선박의 앞머리에 당당하게 설치되어 있을 '선수상'을 연상한다. 그러나 힘없이 늘어진 천사는 선박이 선장의 의지에 따라 힘있게 항해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은유하는 듯 하다.


아마 작가는 이미 삶의 중심을 잃은 인간의 모습을 <닻>을 통하여, 그리고 오롯이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삶을 이끌 수 없는 상태는 늘어진 <천사>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방주를 둘러싸고 있는 일련의 작업들은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거세게 휘젓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풍파 앞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방주와 같은 삶을 한층 더 깊이 비유한다. 



최우람, <닻>, 2022.



글을 마무리하며, 


물론 작가의 작업을 감상한 후 써내려간 일련의 생각들은 작가의 의도와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개개인의 수만큼 각기 다른 다채로운 해석들이야 말로 예술 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에 정답은 없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기꺼이 예술을 향유하고 싶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나의 감상과 생각에 대하여 보다 과감하게 써내려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작업을 보고, 또 글을 정리하는 이 시점에도 '이게 맞을까'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들었고, 더불어 정답에 가까운 해석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렸다. 그러나 부정적인 자의식은 과감하게 내려놓고, 최우람의 방주는 성서에 등장하는 방주와 달리 '희망이 없는' 공간 이라고 읽어내고 싶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당신에게 '작은 방주'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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