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영화가 끝나자 영화관 뒷편에 위치한 입구가 열렸다. 열려 있는 문을 지나며 사람들은 '미쳤다'를 연발했다. 사람들의 눈은 벌게져 있고,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마스크는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미친 영화였다. 2시간 15분 동안 이어지는 이 롤러코스터 같은 대환장 파티의 끝은 감동, 감동의 연속이었다. 영화 포스터 가장 위에 실려있는 박찬욱 감독의 평은 이 영화를 한 줄로 정확히 요약하고 있었다.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을 보니 내 눈에 눈물이" - 영화 감독 박찬욱
편안한 영화일 것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예매했다. 그러나 영화는 심혈을 기울여 이해해야 하는 '다중 우주' 같은 복잡한 개념들이 두 시간 넘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조금은 복잡하고, 그리고 조금은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였다. 서사에 대한 해석은 다른 리뷰에도 많으니, 이번 리뷰에서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한 가지 문장은 단연 "Nothing matters" 즉,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일 것이다. 아마 주인공들만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이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질문은 살아가는 내내 우리 삶에 불청객처럼 찾아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청객과 같은 이 무상함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영화는 137분 동안 우리가 어떻게 이 '덧없음'을 마주하는지, 그리고 이 감정을 지나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세 가지 답변을 던진다. 먹고살기 위해 꿈도 포기할 정도로 바빠지거나. (무상함을 느낄 틈도 없이.) 아니면 모든 것은 무상하니 더 거칠고 폭력적이 되어 살다가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그러니까. 뜬금없지만 "다정해지거나."
주인공 에블린은 코인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민자이다. 요즘 세무 당국에서는 에블린의 세탁소를 '탈세' 혐의로 가압류하겠다는 경고를 한다. 남편은 좀처럼 의미 있는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 에블린에게 이혼장을 들이밀고, 딸은 동성의 연인 벡키와의 관계를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이 와중에 그녀는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아버지를 미국으로 초대한다. 에블린은 매일 일촉 즉발의 상황을 살아낸다. 그녀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바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을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겠다는 신조로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녀는 남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도, 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줄 에너지도 없다. 먹고사는 문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남편이 이웃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자, 남편이 한심하고 멍청하게 느껴진다. 보수적인 중국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동성애자인 딸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숨기고 싶은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사람들의 다중 우주라는 세계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이해하기 조금은 난해한 설정을 취한다. 이 다중 우주란 한 인간이 살아가며 포기했던 가능성과 꿈들이 실현되어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의 다중 우주가 공존하는데, 에블린의 다중 우주는 무한하다. 유명 배우가 되어 파티에 초대받은 '나', 가수가 되어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나', 그리고 요리사가 된 '나', 쿵푸 선수가 된 '나'.... 그녀의 다중 우주가 무한한 이유는 그녀가 수도 없이 자신의 원함과 꿈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삶의 공허를 직면하지 않는다. 그저 포기한다. 그리고 바삐 살아간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한편 부모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받지 못한 딸 조이는 점차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신기하게 우주에서 조이의 모습은 어머니의 욕망 때문에 미쳐버린 괴물 조부 투바키이다. 그런 그녀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없애버리는 베이글을 만들어낸다. 어차피 모든 것은 의미가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 그러니까 정확히는 그녀 자신이 의미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이는 그런 자기 자신을 없애고 싶어 한다.
조이는 이 '무상함'의 문제를 마주하며, '무상함'을 없애기 보다 '자기 자신'을 파멸시킨다. 아무것도 의미 없는 자신의 삶이 고통스럽고 괴로우니, 그것을 미쳐 견디지 못해 자신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에블린과 조이는 마치 우리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자주 에블린이나 조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 둘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화가 주는 해법은 다름 아닌 한심해 보이는 남편 '웨이먼드'에게 있다.
웨이먼드는 이 모든 사태를 '다정함'으로 정리한다. 그는 에블린처럼 스스로를 포기하고 살지 않는다. 자신에게 늘 온기를 유지하고, 또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그 온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가 멍청해서가 아니고, 그는 똑똑하기 때문이다. 그가 전략적으로 다정함을 고수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먹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전략적으로 타인에게 다정하고자 한다.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웨이먼드는 아내의 지랄맞음이나 무기력함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딸이 느끼는 삶의 무상감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그 둘을 가만히 껴안아준다.
웨이먼드의 다정함 앞에 에블린은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멸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단 한 가지.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하고 싶다"라는 솔직한 고백에 도달한다. 늘 딸을 '옳은 기준'에 따라서 '옳은 길'로 대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녀의 고집도 한풀 꺾인다. 남편의 다정함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고 나니, 그제야 에블린을 딸의 행복을 위해서는 '옳음'보다도 '사랑'과 '이해'야말로 옳은 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렇게 그녀는 딸과 그녀의 연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도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늘 소중했지만 깨닫지 못했던 남편에게도 다시금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지구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개개인의 인간은 한 점의 먼지보다도 작을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무 의미 없는 한 줌 모래보다도 적은 시간일 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한 줌의 시간은 지금 우리에게 실재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나와 함께 하는 이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 역시 지금 여기, 아주 선명하게 존재한다. 영화는 웨이 먼드의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대혼돈 속에 흔들리던 다중우주를 정돈하고, 또 깨진 화병 같던 가정을 굳건하게 세워가는 것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성인이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공허함'이라는 달갑지 않는 손님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이 감정을 어떻게 배우지 못한 채로 자란다. 마치 삶이란 늘 의미로 가득 찬 것처럼, 그래서 공허 같은 감정은 존재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12년간 몸담은 학교는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 우주를 이루는 위대한 과학적 진리들 혹은 고난도 수학 문제나 난해한 영어 지문을 해석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한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 갑작스럽게 이 무상함의 감정이 찾아오면, 그제야 우리는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다 허탈하고 의미 없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치 '나만 이런 것 같은' 느낌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기 시작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생산적인 일이나 활동'에 자신의 삶을 던지거나, 혹은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여 이 고통스러운 무의미 혹은 공허의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정을 회피하고, 자신을 마주하기를 거부하기보다는 나와 타인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대해보는 건 어떨까. 웨이먼드가 보여준 다정함의 매직이 에블린과 조이, 그리고 웨이먼드의 삶에도 변화를 이끌었듯 말이다. 비록 우리는 한 줌의 모래와 같은 시간을 살 뿐일지도, 중요한 건 우리에게 삶이 주어졌고, 또 우리는 이 시간 속에 그 삶을 감각하며 살아내야 하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 삶의 시간이 나 자신에게는,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 그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