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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Dec 26. 2022

서로 다른 역사, 그리고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교토 교세라 미술관 - 앤디 워홀 전 리뷰.


교토 교세라 미술관 - 앤디 워홀 전

(긴카쿠지 근처에 위치한 교토의 현대미술관)



1.


뽀로로나 핑크퐁이 없던 시절 (그러니 현지 청장년층들) 우리나라 아이들은 자연스레 일본의 애니들을 야금야금 먹으며 자랐다. 당시 우리의 피와 살을 이루던 것은 학교 앞 100원짜리 불량식품이나 컵 떡볶이나 피카츄 돈가스였겠지만, 우리의 정서적 세포와 조직을 단단하게 만들었던 것은 메이드 인 재팬 애니들이었다.  세일러문이나 피치와 같은 요정 만화나 부모님의 등골 브레이킹에 한몫했던 건담 같은 로봇 만화, 포켓몬이나 디지몬 같은 몬스터 (?) 만화들, 그리고  아따 맘마나 짱구는 못 말려 다다다와 같은 온 유초등 아동의 사랑을 받았던 일상 애니들까지.



무수한 애니 중에서도 그 시절 나의 최애는 슈퍼갤즈의 고토부키 란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 우리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시작되는 분노에 기반한 역사 교육을 받는 주체이자 일본에서 부단히 생산해 내는 문화 콘텐츠들의 최전방 소비자이기도 했다.


나 역시 역사적으로는 일본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일본 문화에 대한 익숙함을 가지고 자란 세대였다. 여행지로서의 일본은 당시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착취했던 전범국으로서의 일본과 자주 분리되어 생각되곤 하지만,  여행 직전 주까지 사할린 섬의 강제 징용 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수업하고 있으니, 어딘가 마음이 시끌시끌해지는 듯했다.



대규모 앤디 워홀 전이 열리고 있던 교토의 교세라 미술관. 건물도 아름답지만 건물 내부는 한 뼘 더 인상 깊었다.


여행은 전반적으로 평온했고, 여행지였던 교토의 면면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증오와 분노로 물든 역사가 잘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전시장의 한쪽 면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고, 유리 너머로는 일본식 정원을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방문해도 좋을 곳.



그러나 이 평온한 마음은 교세라 미술관의 앤디 워홀 전을 방문하며 비판이 서려있는 날카로운 마음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2.


교토에 도착하여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다면, 도시 곳곳에 앤디 워홀 전시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는 점이었다. 유명 관광지에도, 역 근처에도, 골목골목에도 앤디 워홀의 마돈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오사카에 돌아가니 심지어 오사카에도 붙어 있더라!)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여행의 둘째 날 저녁 교세라 미술관에 들렀다. 미술관 근처 길은 마치 우리나라 국현 근처 길처럼 정갈하고 넓은 풍경을 구경하기 좋았다. 날씨가 따뜻하다면 커피 한 잔을 들고 적당히 걷고 쉬기 좋은 코스들이 이어졌다. 미술관 관계자는 이곳 근처에 교토를 대표하는 박물관과 갤러리들이 꽤 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되는대로 꼭 둘러보라고 하였다.





입구로 들어가면 관람자의 말을 텍스트로 변환하여 전광판에 번쩍이는, 흥미로운 작업이 반겨주고 있었다.



팝아트나 앤디 워홀이야 올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며 후기 인상주의 다음으로 흔하디흔하게 접했던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교토의 앤디 워홀이 다른 도시에서와 달리 조금 더 특별했던 이유는, 교세라 미술관이 앤디 워홀의 교토 방문, 그리고 일본이 앤디 워홀의 작업에 주었던 영향을 중심으로 전시의 도입부를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큐레이팅 방식이었다.


1956년 교토에 방문한 앤디 워홀. 아마 가운데 있는 금발의 남자로 추정된다.




3.


커다란 전시장의 한 파트는 전부 교토에 대한 앤디 워홀의 애정을 다루고 있었다. 앤디 워홀이 교토에서 지냈던 기록들을 더듬어보고, 그가 이곳에서 느낀 깊이 있는 안정과 만족에 대하여 읽다 보니. 3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일본에 시달린 우리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하여는 절대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대하여 체감할 수 있었다.


앤디 워홀의 일본 여행 기록도 전시 중이다. 6월이라니, 한창 따뜻하고 좋은 때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장의 한 쪽 벽에서는 그에게 교토가 영감의 땅이고, 이후 그가 보여준 ‘꽃’ 그림은 일본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꽃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뮤즈가 되었고, 또 그가 사랑했던 일본을 다룬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교세라 미술관은 '세계적'인 작가가 교토에 들렀다는 사실과, 그곳을 십분 누리고, 이후 그곳에서 받은 영향을 기반으로 작업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이건 나의 망상일 수 있으나, '우리는 이 정도야'라는 어깨가 귀까지 올라간 듯한 도취를 엿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방문했던 관광지를 앤디 워홀도 방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들은 따로 전시가 되어 있었다.



워홀에게 일본이라는 땅은 곧 휴식이었다. 그는 작업을 잠시 제쳐두고, '동양'이라는 당시 서구 예술가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충족 시키기 완벽한 나라를 십분 즐기기 위하여 드로잉 재료만 가지고 일본을 방문했다고 한다. 작업에 전념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스케치북과 펜만 가지고, 그곳에서 얻은 영감을 쉬엄쉬엄 스케치했던 앤디워홀을 생각하니. 문득 그는 그가 일본 땅을 밟을 무렵 그 나라를 관통했던 지난한 역사에 대하여 알고는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 청량한 작업도 일본에서 얻은 영감으로 제작된 작품이었다.


워홀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가 1956년이니, 한반도는 30년 부당한 식민지 생활에 대한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곧 다시 시작된 내전으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무너진 곳들을 재건하기 급급한 시기를 겪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힘이 아닌 다른 나라에 의하여 합법적이지 않은 지배를 받는 과정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아닌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를 위하여 노동을 하고 싸우고 폭력에 노출되어야 했다.  부모가 한창 필요한 나이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형제자매들과 억울하게 헤어져야 했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 삶이란 곧 상실과 분통함의 연속이었다. 고유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가치를 절하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우리 것'을 많이도 잃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여전히 건재한 일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서양인들에게 이런 역사들은 읽히지 않는 듯하다. 그들에게 일본은 역사적 진공 상태 속에 있는 나라인 것인지, 오늘날까지도 많은 서양인들은 일본을 동양에 대한 환상을 충족해 주는 땅으로 여기는 듯하다.  일종의 무지에서 비롯된 서구의 경외심과 자문화의 우수성을 과대포장하기 좋아하는 일본 정부 입김이 어우러져 동양의 환상, 일본을 만들어낸 것이겠지.


영어로 기록된 앤디 워홀 글자 밑에 타이포 그래피로 쓰인 일본어가 인상적이었다. 심오한 의미 같지만 '앤디 워홀 교토'라는 뜻.



그럼에도 교세라 미술관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굳건히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식민 지배의 주체였지, 객체가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전시장을 거닐다 보니, 앤디 워홀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가왔다. 미국에서도, 그리고 유럽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낯선 워홀의 면면이었다.




4.



교토 거리를 걷고, 또 유명한 정원이나 절에 방문했을 당시 생각보다 많은 서양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세라 미술관에서 역시 서양인들이 아주 많았다. (교토에 여행 온 백인들은 다 여기에 오는 것일까? 의문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들은 워홀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혹은 별생각이 없을까, 아니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할까. 궁금증에 익스큐즈미를 외치며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전시를 감상했다.


'세계에 일본 무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사람들 밖에 없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지만, 일본에 대하여 우리처럼 복잡 미묘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세계에 우리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여하튼, 앤디 워홀은 전후 일본에 들러 예술적인 영감을 십분 얻었다는데, 삼십 년 대한민국 토박이로 살아온 나는 앞으로 남은 평생을 일본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하기 어려우리라_는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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