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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Dec 26. 2020

뉴호프, 땅의 운명

펜실베이니아



펜실베이니아 도를 펼쳐놓고 보쪽 주 경계를 따라 델라웨어 강이 흐른다. 강 중류에 뉴호프(New Hope)라는  마을이 있다. 1700년 반, 처음 기록에 등장할 때 인구는 800 남짓이었다. 미국 독립전쟁(1775-1783) 전부터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다. 마을은 강줄기 붙 배추벌레마냥 길쭉하게 생겨 먹었다. 위치가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잇는 요크 로드(Old York Road) 딱 중간이라 두 도시를 오가는 사들은 여기서 밤을 묵고 강을 건넜다.


자연스레 나루터가 생겼다. 여관 주인 이름을 따 '코리엘 나루'(Coryell's Ferry)라 불렀다. 제법 사람 사는 구색을 갖추던 1790년 큰 불이 났다. 선착장과 거룻배, 시설물이 사흘 밤낮 불탔다. 부서진 마을은 고 긴 잠에 빠졌다. 사이 개발의 포클레인은 다른 곳에서 먼저 시동을 걸었다. 어,  하는 사이 78번 95번 하이웨이가 마을을 비켜 놓였다. 뒤늦게 기지개를  마을 사람들은 심기일전, 명패부터 바꿔 달았다. '뉴호프'라고.



오른쪽 길은 '뉴호프 램버트빌' 다리로 이어진다. 건너면 뉴저지주 램버트빌, 독일계 이주민이 정착한 마을이다.


처음 본 겨울의 뉴호프가 나는 좋았다. 내가 살던 뉴저지주 클로스터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사십 분. 287번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가 202번 지방도로 바 때쯤 도착다. 12월이었다. 겨울 햇살이 하도  허연 배를 드러낸 언 강 어디선가 쨍하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큰길이라곤 메인 스트리트가 유일한데 한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차로 5분이면 닿았다.


소방관들이 성탄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전통적으로 소방관이나 경찰 아니면  청소국 자리에 많이 지원했다. 주정뱅이로 무시당하 처지에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면 시민권까지 주는 그만한 직드물었으니까. '뉴호프 의용소방대'(NH VFD) 로고가 선명한 빨간 불자동차. 아일랜드계 소방관 산타클로스는 백파이프 연주에 맞춰 손을 흔들었다.



산타 할아버지와 불자동차는 빨간색 덕분에 잘 어울린다. 뉴호프 기차역 앞 산타도 유명해졌다.


마을 옆으로 운하가 다. 불탄 마을을 재건할 때 사람들은 델라웨어 강물을 끌어들여 수로를 만들었다. 물길은 도로와 나란히 달다. 이름하여 '델라웨어 운하'(Delaware Canal). 수로에 배를 들이 양쪽 둑에서 말들이 줄을 달아 끌었다. 말이 일하던 그 길은 이제 산책로로 변했다.


걷기 좋은 흙길은 60마일이나 이어져 '델라웨어 트레일'(Delaware Trail)이 되었다. 머리 굵은 사람들은 물길 한 가닥을 마을 안으로 돌렸다. 공터를 끼고 큰 낙차를 만든 다음 물레방아를 놓았다. 아침저녁으로 곡식을 도정(搗精)했다. 곧 근처에서 제일 큰 마을 방앗간(Village Mill)이 었다. 그때 지은 방앗간이며 창고들은 지금 '벅스카운티 플레이 하우스'(Bucks County Play House) 변신했다.  



델라웨어 운하엔 유람선이 따로 없다. 사실 그걸 띠울만큼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다.


나는 이런 게 신기했다. "방앗간(mill)은 쩌자고 죄다 공연장(playhouse)  걸까?" 세 번 방문고서 답을 찾았다. 이듬해 9월이었다.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랬다. 뜯어 놓은 이불솜 같은 뭉게구름이 떠다녔다. 플레이하우스 마당에선 커뮤니티가 초청한 밴드가 , 공연을 했다. 사람들과 버즘나무 아래 앉아 차가운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쟝-쟝--. 일렉트릭 기타가 포효했다. 방앗간이었던 공연장 들썩거렸다. 그때 아하, 하고 무언가 머리를 잡아챘다. 른 세계의 틈이 잠깐 열렸다. 그것은 피파니(epiphany), 하나의 눈뜸이었다. 그러니까 이백 년 전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었다. 그걸 공급하자니 곡식을 찧고 빻을 방앗간이 절실했다. 앗간 당연 마을 한복판에 설 수밖에. 한동안 물레방아는 싱싱 잘도 돌아갔다.



벅스카운티 플레이하우스는 늘 북적거린다. 로버트 레드포드, 그레이스 켈리가 브로드웨이 진출 전 이곳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은 이제 먹고살 만해졌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끼니를 때울 빵이 아니라 영혼을 보듬을 '마음의 양식'(spiritual nourishment)이었다. 방앗간은 생산 모드를 전환했다. 빵대신 멘털 푸드를 만드는 플레이하우스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공간이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Mill이든 Play House든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걸 열심히 만들고 있는 거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혼자만 방앗간이 공연장으로 바었다고 생각했을 뿐. 세상을 설계한 눈으로 보면 공간의 역할은 전혀 변함없다는 사실. 나는 소스라쳤다. 리고 모든  명확다. 시간을 관통하는 '세상의 이치' 이토록 엄연한데. 나는 또 얼마나 완강히 눈을 감고 있었는지. 그렇구나. 나는  다른 마을, 밀번(Millburn) 졌던 슷한 의문 스르륵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봄부터 가을까진 밤에도 갖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마을 사람들은 공연도 공연이지만 이곳의 존재 자체를 더 좋아한다.


뉴욕 남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밀번'이란 마을이 있다. 여배우 앤 해서웨이가 나고 자 곳이다.  작은 공연장이 하나 있다. 이름은 '페이퍼밀 플레이하우스'(Papermill Play House). 나는 '인어공주' '메리 포핀스' '사운드 오브 뮤직' 등등 브로드웨이에서 놓친 물간 뮤지보러 여길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여기는 '종이 제작소'(페이퍼 밀)였다. 안 입는 헌 옷을 조각내어 물에 불리고, 그걸 다시 물레방아로 찧어 곤죽을 만든 후 얇게 떠서 양질의 도화지를 만들었다. 인쇄업자에게 종이를 대던 페이퍼 밀은 이제 브로드웨이에 공급할 배우를 키우망주 화장되었다. 내가 아는 이름만도 앤 해서웨이, 패트릭 스웨이지, 휴 오브라이언 두룩. 앗간이 세상의 필요에 따라 산 품목을 바다는 이야기다. 도화지에서 배우로.



밀번의 페이퍼밀 플레이하우스. 왼쪽 시계는 내가 방문했던 어느 날의 오후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듯 공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갖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엄숙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숭게 느껴졌다. 건물 한 귀퉁이, 나무 한 그루, 땅 한 뼘에게 물었다. 너희는 맡은 일이 뭐냐고.  질문은 나에게 돌아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누구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 맡은 소임을 다하고 있긴 하는지"



1891년 뉴호프에 기차가 들어왔다. 양차 대전에 참전했던 동네 젊은이들이 귀향하면 기차역은 잠깐 떠들썩해진다.


그런데,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예일대, MIT대 교수이자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은 존재와 본질에 관해 없이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것은 마치 뉴호프와 밀번의 플레이하우스를 두고 한 말처럼 보였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을 짓 중 뉴욕을 다니러 왔다가 펜스테이션 역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발견된 그의 주머니 속 메모 적혀 있길.


"어떤 공간을 만든다는 건 말이지. 어떤 운명는 일이라네. 오브제가 아니라니."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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