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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an 26. 2021

뉴욕에서의 세 번째 크리스마스

뉴욕 맨해튼



그 묘한 어린 남매를 처음 맞닥뜨린 건 뉴욕에서 맞는 세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맨해튼으로 출근하자마자 "12월 24일, 오늘은 얼리 리빙해도 좋다"는 메시지가 컴퓨터에 나돌았다. 나는 마시다만 스티로폼 컵 던킨 커피를 들고 점심시간도 안돼 사무실을 나섰다. 왔던 길을 거꾸로 되짚어 뉴저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섯 시가 넘자 개라지에서 차를 다시 꺼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몇 년째 가는 곳이 있다. 그것은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다. 늘어진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에 불이 들어온 타운 센터를 가로질러 뉴욕으로 가는 팰리세이드 파크웨이에 차를 올렸다. 식료품 택배 박스를 잘게 부순 듯한 싸락눈이 차 앞 유리창을 쓸고 다녔다. 송풍구 틈으로 들어온 찬 바람은 소매 끝 빈 팔목에 오소소 소름을 돋웠다. 나는 덜걱거리는 송풍구를 손가락으로 밀어 바람 방향을 바꿨다.


조지 워싱턴 브리지에 가까워지허드슨 강의 수분을 빨아들인 싸락눈이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다리 위라 바람이 거세졌다. 차는 바람의 몸통을 힘겹게 가르고는 앞 머리를 가까스로 들이밀며 눈보라를 밀쳐냈다. 하늘이 회색 이불보처럼 자꾸 내려왔다.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나는 큰 맘이라도 먹듯 안개등을 켰다. 뉴욕 상공에 형성된 정체 전선을 따라 구름대가 머물 거라더니 자칫 눈폭탄을 퍼부을 태세였다. 뉴욕에 내리는 눈은 늘 무언가를 예감하게 만든다. 그게 이 도시가 가진 특징이다. 좋은 일일지 아닐지가 문제이지만. 조 브리지가 끝나는 곳에서 나는 더 직진하여 FDR 드라이브로 들어섰다. 강변 순환로를 따라 내려가다 96번가에서 센트럴 파크 이정표를 보고 시내로 우회전할 생각이었다.



왼쪽 어퍼이스트사이드는 뉴욕에서 제곱미터 당 땅값이 가장 비싼 최고급 주거지역이다. 우편번호 10021, 10022, 10028, 10029 그리고 10065 지역이다.


차 댈 데가 있을까 하는 조바심에 마음이 허둥거렸다. 이쪽은 레지덴셜 구역이라 스트리트 파킹이 만만치 않다. 긴 맨해튼 어딘들 주차가 쉽겠냐 만은. 80번가로 꺾어 들자 찰스 열쇠(Charles' Locksmith) 앞에 빈 틈이 나타났다. 추 눈대중 해보고 링컨 타운카를 엉덩이부터 밀어 넣었다. 그런 내가 못마땅한지 건물 처마에 달린 가고일을 부라 노려보았다. 여는 렉싱턴 애비뉴와 80번가의 교차점. 나는 연례 의식이 되어버린 올소울즈 처치(All Souls Church)의 성탄 전야 예배에 도착한 참이었다.    



영어로 '업타운'하면 산등성이 고급 주택가를 말하지만 산이 없는 뉴욕은 글자 그대로 맨해튼의 위쪽 지역을 가리킨다.


어퍼 이스트이드는 근사한 구석이 있다. 브라운스톤 타운 하우스와 석조 테라스가 즐비한 59가와 96가 사이. 이스트란 말이 붙은 건 센트럴파크를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공원이 완성됐을 때, 부자들은 자연과 가까이 살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승마하기 편리한 이 지역으로 줄줄이 이사를 왔다. 자연스레 격조가 함께 따라왔다. 오피스 빌딩 일색인 내가 근무하는 미드 타운과는 공기마저 다르다. 그런데 올소울즈 처치는 렇게까지 으스대 않다.


본명이 '모든 영혼을 위한 유일신교'(Unitarian Church of All Souls)인 이 복음주의 교회는 예수가 훌륭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믿는,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단이다. 그래서인지 리버럴하 보헤미안스럽다. 우리말로 하면 화려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 정도. 1935년에 업타운 지금 위치로 옮겨와 노숙인, 이민자, 성 소수자, 전문직 종사자, 토박이 주민과 안면을 텄다. 교회라기보다 심리 상담, 명상, 뜨개질, 노래 교실, 결혼식,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 커뮤니티 센터 구실을 해왔다. 그 때문에 나 같은 틈입자가 나타나도 누구 하나 경계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더구나 크리스마스이브라면 더더욱.    



교회인 듯 교회 아닌 듯한 올소울즈 처치의 정면. 이곳 '윗동네'에선 엣지 있는 결혼식 장소로 손꼽힌다.


곧 저녁 8시 예배. 지역주민을 위한 5시 예배는 한 차례 끝났다. 이번은 초저녁 순서를 놓친 노부부, 늦게 퇴근한 직장인, 나와 비슷한 뜨내기들로 자리가 찼다. '생추어리'(sanctuary)라 부르는 예배 공간은 소박하다. 길쭉한 직사각형 홀일 뿐이다. 홀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에 벤치 하나씩을 놓았다. 이 긴 의자를 '퓨'(pew)라 불렀다. 정면 강단도 단출하다. 계단 네 개를 놓아 바닥을 무릎 높이로 올렸을 뿐 온통 하얗게 칠한 벽이 전부다. 그게 다다.


십자가도 없다. 안에도 바깥에도 첨탑에도 십자가를 놓지 않았다. 요즘 들어 십자가를 걸지 않는 교회가 하나둘 생겨나지만 여긴 진작에 그랬다. 수쟁이는 왜 형틀을 숭배하느냐고 비웃는 소리가 있었다. 예수가 만약 전기의자에서 죽었다면 그걸 모셔놓고 기도할 거냐고까지 꼬집었다. 이 교회가 그런 억측에 굴복하여 십자가를 치운 건 아니다. 다만 예수를 구세주로 보지 않는 데다 우상 배격을 폭넓게 해석하는 게 이유이다. 기선 교회 문패조차 찾기 어렵다. 교회 입구엔 '모든 영혼, 모든 마음, 모든 가슴'(Open Souls, Open Minds, Open Hearts)이라고 쓴 플래카드만 걸렸다. 맨해튼 교회는 부분 장로교 아니면 성공회인데 그들에게 익숙해진 눈으로 여길 보면 랄까, 다분히 컬트스럽다. 런 이유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한국인들은 거의 찾을 수없다.



출석 신도는 300-400명. 스크린을 걸고 예배를 생중계하거나 가스펠 성가대가 윈형으로 운집하는 뉴욕의 다른 교회에 비하면 소박하다.


이윽고 남녀 목사가 나란히 등장했다. 학위 가운 비슷한 긴 옷을 입은 두 사람은 강단 양쪽에 놓인 각자의 설교단, 강대상(講臺床)까지 헤엄치듯 전진했다. 여긴 독특하게도 남녀 두 사람이 예배를 인도한다. 웅성거리던 실내가 바다 속인 양 라앉았다. 오늘 밤 찬양 봉사는 5인조 남성 아카펠라 팀. 는 달란트가 반짝이는 젊은이들이 많기도 하다. 들은 늘 저녁, 두 자기들의 교회로 찾아가는 게 분명했다. 중창단은 강단 중앙에 자리 잡았다.


올 소울즈의 찬양은 웬만한 공연 능가한다. 구글에서 짧은 평을 보고 처음 여길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냥 앉아만 있는 데도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을 한꺼번에 용서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깅그리치(Galen Guingerich) 목사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잘 생겨서 좋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혹독한 계절이 왔습니다. 겨울은 바로 여러분의 집 앞까지 당도했습니다" 낮고 파장이 긴 목소리. 문장은 등 푸른 생선처럼 펄떡며 다가왔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가 시작됐다.



펜타토닉스의 할렐루야. 190cm가 넘는 스콧 호잉, 저음의 맷 샐리, 여자보다 높은음을 내는 미치 그래시, 가슴을 두들겨대는 케빈 올루졸라.


내 앞줄에 어린 남매가 앉았다. 중년의 백인 부모는 영 정신줄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창단 다섯 남자가 막 '할렐루야'를 불러 젖혔으니까. 듣고 있으면 없던 종교도 생긴다는 할렐루야. 심해어가 내는 듯한 베이스의 초저음이 공기층을 흔들었다. 옆머리를 바트게 쳐올린 카운터 테너의 고음은 천장을 찔러댔다. 아카펠라란 이탈리아 말이 '교회풍으로 노래하라'는 뜻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찰떡궁합일 줄이야.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하지만 두 아이는 저희들만의 세계에서 따로 예배를 보는 듯했다.


일고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뽀얀 얼굴의 계집아이가 중증의 발달장애 오빠를 침착하게 돌보았다. 몰입 곤란이 심한 오빠가 얼굴 근육을 비틀며 손을 휘젓다가 주보를 떨어트렸다. 하필 그게 내 발등에 얹혔다. 나는 그걸 주워 무심한 척 계집아이에게 건넸다. 그러자 얼굴 가득 미안함을 담아 다보는 계집아이. 금발 머리와 까만 눈동자가 막 생일선물 박스를 뜯고 나온 인형처럼 선명했다. "그 여인의 아름다움과 그 달빛은 당신을 무너뜨리고 말았어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의 공교로운 노랫말이 귓등을 스쳐가고, 나는 계집아이 얼굴에 쓰인 미묘한 심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었다.



'캐럴 서비스'라 부르는 성탄 전야 예배는 뉴욕 교회 곳곳에서 열린다. 누구든 참석할 수 있다.


계집아이는 오빠에게 주보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둘은 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의 시선이 빗나가는 걸로 봐서 눈 맞춤이 어려운 시각 장애가 벌써 와 있었다. 그 모습에 내 마음이 서걱거렸다. 몸이 불편한 오빠와 똑 부러진 계집아이. 둘을 그냥 놔두는 부모. 아무 관심도 없는 주변 사람들. 괜히 나만 허둥댔다.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에 오빠를 돌보다니. 그게 나는 안타까운데, 그게 자꾸 아름다웠다.


계집아이는 자신들이 주의를 끌어 예배를 방해할까 봐 조심스러워했다. 뒷자리의 나에게 제일 레이다를 곤두세웠다. 나는 경을 고쳐 쓰며 모른 척 주보 읽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지켜주려 애를 썼다. 그러다 슬쩍 훔쳐보았다. 계집아이 오빠의 손을 쥐고 주보의 인쇄된 글자를 손끝으로 읽게 하고 있었다. 내 가슴 어딘가에서 '딩' ()이 울렸다. 심금(琴)이란 단어가 이렇게 견되었 싶었다. 마치 레이먼드 카버 소설 속 한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깅그리치 담임 목사와 풀브라이트 부목사는 중앙 강단 양끝에 나란히 서서 주거니 받거니 예배를 인도한다.


대성당》(The Cathedral)던가. 주인공 로버트는 어느 날 집을 방문한 아내의 옛 동료, 맹인에게 당을 설명해야 하는 난처한 순간을 맞았다. 맹인은 당연히 성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로버트는 온갖 단어를 동원해서 대성당의 외관을 묘사했다. 하지만 햇볕 서지는 성당의 시각적인 이미지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었다. 로버트 낙담맹인이 제안했다. 서로의 손을 포개 쥐고 종이 위에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둘은 그렇게 했다. 로버트는 자기 손 위에 맹인의 손을 얹은 기묘한 형태로 첨탑의 외곽선을 따라 그렸다. 처음엔 눈을 뜨고 시작했다. 어느 순간 로버트도 눈을 감아버렸다. 마침내 완성하는 눈 감은 두 남자의 대성당. 로버트는 전율한다. 언어를 버리고서야 되레 가능해지는 소통.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무엇. 나는 궁금했다. 어떤 느낌이었을까. 대체 어떤 생각이 두 사람을 이끌어 나갔을까. 그들이 포개어 잡은 손은 무엇을 남기고 또 변화시켰을까. 필사의 끝에서 과연 그들은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모종의 환희를 경험고 만 것일까. 울림은 나에게 오래도록 명징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은 도처에서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하지만 연극은 소설보다 감동이 덜했다.


바로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꼬무락대는 두 개의 작은 손. 그걸 보  한 귀퉁이가 서걱거리다 못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무 의도조차 없이 누군가의 손을 잡 적이 있.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던 따뜻한 체온. 그런 건 잊은 지 오래였다. 첫 만남에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며 손아귀에 힘을 넣어 악수하라던 승진자 교육 따위가 고작이었다.  손은, 사람들이 무엇을 부탁할까 봐 자기 방어에 급급해 지레 허공을 에 바빴다. 손을 잡고 진심을 나누는 류의 람들이 부러웠다.


일찌감치 융은 통찰했다. 인체의 수많은 부위 중 가장 예민하게 마음을 전하는 이 손이라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도할 때 손을 모으고, 약속할 때 손가락을 . 헤어질 때 손을 흔드는 것도 손이 가진 정신적인 능력을 믿기 때문이라 했다. 시인 정호승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손이 되었다.'라고 노래했다. 호스피스 간호사환자가 눈 감기 전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이 '손'이라고 했다. 저승로 들어가며 손을 잡아달라는  마디. 나는 손을 잡고 들려주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 눈을 감으면 또렷하게 느껴는 어머니의 손길을 떠올렸다.



그사이 눈이 그쳤다. 눈 때문에 세상이 밝아진 건지 조명 때문인지 올소울즈가 환해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주기도문을 기 시작. 예배가  다는 신호다. 계집아이와 오빠가 포개어 잡은 두 손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르게 그들이 하는 대로 라서 주보를 손 끝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끈한 종이만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이번엔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어쥐었다. 내 손이어서 그런지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덤덤했다. 다만 무언가에 살짝 제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무게감을 실은  나는 다시 주보를 쓸어보았다. 그러자 주 미세하게 언가가 만져다.  


그것은 고양이 등을 살며시 쓰다듬을 때 느껴지는 감각의 변화 같았다. 또는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찾은 안감의 솔기 같기도 했다. 손에 만져지는 감각에 집중하자 귀가 먹먹해졌다. 그리고 위의 소음이 았다. 반대로 내  또렷해졌다.  끝에 무엇은 소설 《대성당의 마지막  줄 미하게  듯했다. 문장은 이렇게 읽혔다.  순간 토돌하게 소름 돋은 내 마음처럼.


"...It..is....re..ally...some..thing..."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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