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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Feb 18. 2021

쩜뿌 한번 해줄래요?

뉴저지 노우드



"쩜뿌 한번 해줄래요?"

운전석 문을 여는데 덩치 큰 흑인 사내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얼굴 흰 이 두드러졌다. 에는  끝에 빨갛고 검은 집게가 달린 케이블을 었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 보라며 한쪽을 가리켰다. 검정과 하양의 경계가 뚜렷한 그의 손날 가자 룸 뚜껑을 어 입 어젖히, 천장을 꼬챙이로 받쳐놓은 차가  있었다. 고비 한 마리가 악어새처럼 '후' 아래를 종종거렸다. 차량 네트를  후드 불렀다. 말인즉슨 배터리가 방전되는 에 시동을 걸지 못해 누군가 들어오길 기다렸다며.



큰길에서 요양동 건물까지 들어가려면 한쪽은 숲 다른 한쪽은 잔디밭인 가운뎃 길을 통과해야 한다.


그제야 상황이 짐작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일요일 아침부터 여기를 찾아올 사람 드물 테니 제법 기다렸겠다 싶었다. 나는 막 주차한 링컨 타운카를 앞으로 쑤욱 빼서는 그의 차와 정면으로 마주 보게 댔다. 노란색 뉴욕 택시였다. 보통 옐로 캡이라 부르지만 우리끼린 '핵'(hack)이라 는. 핵의 첫 번째 뜻은 '늙은 말'이다. 여 차도 사람도 늙고 고장 나서야 모이는 곳인가 싶어 음이 살짝 공교로다. 11월이 막 시작한 뉴저지 중부 작은 마을 노우드, 뉴저지의 새 그들의 사촌지간 뉴욕주의 새 꺼번에 모여드는 맥클레란 숲 속에 위치한 버킹엄 요양원(Buckingham Care & Rehab Center)에서였다.



노우드는 North Wood, '북쪽 숲'에서 유래하였다. 이름처럼 슢이 우거진 뉴저지 주의 버로우이다.


그러고 보니 그 차를 봤던 기억이 났다. 지난봄부터 주차장에 타나던 택시였다. 노란색 영업용이라 어딜 세워 놓아도 눈에 띄었다. 뭐 그렇다고 택시 드라이버와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여길 오는 건 순전히 아이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봉사를 온 날, 우연히 피아노를 더니 할머니들이 또 와달라는 부탁을 다고. 그때부터 아이는 휴일 아침 늦잠을 자는 나를 흔들어 다. 아이는 본관 리셉션 홀에서 일요일 오전 두 시간씩 피아노를 연주했다. 무슨 곡을 치는지 또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랐다.


한 번도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가 보진 않았으니까. 내가 하는 일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의자를 벌렁 뒤로 젖힌 채 선잠 다가 연주를 마치고 나온 아이가 을 두들기면 다시 태워 오는 게 전부였다. 미국의 요양원이란 곳이 내가 무슨 인연을 만들거나, 나한테 어떤 의미가 생길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날 아침 택시 드라이버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차량 영어에 엉터리가 많은데 '점프 스타트'는 여기도 썼다. '빵꾸'가 가장 많이 쓰는 우리식 영어였다.


그가 '쩜뿌'를 하는 동안 나는 차 안으로 들어가 있기도 뭣해 주차장 앞 허리 높이 화단 경계석에 엉거주춤 기대어 다. 발밑으로 다람쥐 한 마리가 욕 닉스 농구팀 포인트 가드처럼 방향을 바꿔  달아났다. 택시 드라이버답게 그는 단번에 시동을 걸고는 접지 케이블을 걷어  트렁크에 넣고, 나에게 다가왔다. 충전을 하려면 적어도 십여 분은 엔진을 돌려줘야 하니까. 그 접근하자 스르륵 저절로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뉴욕 택시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내가 먼저 선방을 날렸다. 뭘 묻기라도 하면 대답하느라 피곤해질 테니 미리 질문을 던지는 게 나을 해서였다. 당하는 것보다 시키는 게 백 번 유리하니까.  내가 호의를 베푼 셈이니 질문이  부대껴도  . 그 대답잠자코 듣다가 고개나 두어 번 끄덕여 주면 덜 어색할 거라는 계산 빠르게 다.



주차장만 보고 웬 방문객이 이리 많나 했는데 알고 보니 모두 요양원 직원들의 출퇴근용 차량이었다.


"작년 이맘때 할머니 한 분을 이곳으로 모시고 왔지요" 택시 드라이버가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힙한 스트리트 발음이었다. 언제라도 말을 끊을 요량인지 전후 사정을 뭉텅 잘라먹은 말본새였다. "그고는 지난봄에 연락을 받았어요, 돌아가셨다고. 어떻게 해서 나한테까지 가 온  지만. 그때부터 가끔 봉사를 나오죠. 오늘처럼요."


그는 브루클린 차고에서 쉬는 차를 받아 여기 건너온다고 했다. 프 차라 정비가 엉망이라면서. 브루클린에서라면 족히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라 생각이 들었. "할머니는 누구신데요. 어떻게 분이었어요" 예스 노가 아닌 설명이 필요할 만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브루클린 흑인 악센트를 잘 알아듣지 못해 내가 지레짐작한 부분을 다 빼버린다 해도 그의 대답은 여간 우이하지 않았다. 나는 그만 이야기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계단을 반층 올라가는 오래된 구조의 아파트. 아래층엔 마부나 하인들이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일요일 저녁에 콜을 받고 주소지로 차를 몰고 갔니다. 이스트 할렘의 오래된 프리워(pre war) 아파트였어요. 왜 있잖아요. 2차 대전 전에 지었다는, 하고 그가 끊어진 이야기를  이었다. 도착해서 경적을 울렸지만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어요. 교대 시간이 다 되어 받은 콜이어서 마음이 살짝 급해졌죠. 그래서 그만 차를 돌릴까 했는데 어,  몸은 되레 문을 열고 내리고 있. 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럴 때가 있지요."


계단을 반 층 올라가 건물 입구에 달린 인터폰을 눌렀답니다. 예약이 잡힌 건도 아니고, 평소엔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데, 그날은 무언가에 등을 떠밀던가 봐. 인터폰에서 모깃소리 만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금방 갑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그러고도 칠팔 분 시간이 흘렀죠. 마침내 문이 열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흔이 가까운 조그마한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셨어요. "기사 양반, 내 가방 좀 옮겨줄래요" 하시면서.



그의 말을 옮겨 보면, A small woman in her 90's stood before me. Just like somebody out of a 1940's movie...


엘리베이터가 없는 워크업(walk-up) 아파트였. 계단 옆 할머니 방  앞에 작은 여행 가방이 놓여 있더군요. 그걸 집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뒤로 보이는 집안 모습 때문에요. 사람이 살던 흔적을 싹 지워버린 듯했어요. 휑한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죠. 빈 그릇장과 하나 남은 식탁 의자에는 "팔림"(Sold)이라고 쓴 가격표가 붙어 있었. 에스테이트 세일에서 긴 했는데 아직 실어가지 않은 게 분명.


가방을 차에 싣고 얼른 돌아와 할머니를 부축해 드렸어요. 고맙다고 하시기에 "저한테도 키워주신 할머니가 계셨거든요" 라고 말했답니다.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시 더 다른 말 하지 않으셨. 택시에 오른 뒤 갈 곳을 쓴 메모를 건네주시고는 시내를 통과해서 가자고 하시더군요. 에프디알(FDR, 순환도로)을 바로 타면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다운타운로 들어가면 한 시간도 넘게 걸릴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어요. 요금이 제법 나올 거라는 이야기는 꾹 참았요.



이스트 할렘, 헬스 키친, 그래머시 앤 플랫 아이언, 트라이베카, 리틀 이틀리, 첼시 등등 모두 맨해튼의 동네 이름이다.


할머니는 저만 괜찮다면 돌아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급할 게 없다면서요. 그리고 덧붙이셨죠. "지금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늙은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 말이에요"라고. 놀랍고 죄송한 마음에 곧 교대시간이라 빨리 돌아와야 한다는 말 쑥 들어가 버렸요.  


그러면서도 에프디알 순환도로 대신 지금이라도 97 스를 타고 센트럴 파크를 가로지르면 제시간에 돌아올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어요. 하지만 할머니를 보면서 가족을 혼자 남겨두고 절대로 내가 먼저 죽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헌터칼리지를 지나버렸어요. 할머니는 제 복잡한 심경과 달리 담담한 어조로 말씀을 시작했어요. "의사가 말하길 나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네요." 그 말에 저는 조용히 요금 미터기를 눌러 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물어드렸죠. "할머니, 어디 가보고 싶은데 있으세요."



플랫 아이언 빌딩이 있는 23가, 극장이 몰려 있는 42가 .


그 후 두 시간 동안 할머니와 저는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니다. 머니는  시절 리셉셔니스트로 일했 그래머시의 석조 호텔을 보여어요. 다음 고인이 된 남편과 젊어 살았다는 웨스트 빌리지의 5층짜리 코업(Co-op)으로 데려갔고요. 또 소싯적 다던 댄스 스튜디오 다며 철제 사다리가 담쟁이처럼 벽을 타고 오르는 트라이베카의 주철 건물(Cast Iron)을 손짓하셨어요.


첼시 골목에서는 천천히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창밖을 구경하시는데 제가 다 궁금다니까. 아마 할머니 만의 추억이 있는 곳이었던가 봐요. 한참을 돌아다닌 후 셨죠. "이제 피곤하네요. 그만 제 목적지로 주세요" 라. 링컨 터널을 지날 때 하도 조용하길래 룸미러로 봤더니 주무시고 계셨어요. 미동도 없이요. 저는 차가 흔들 할머니가 깨실까 봐 브레이크도 밟지 않았답니다.



하이라인에서 내려다본 미트패킹에서 첼시로 이어지는 거리의 밤 풍경.


도착한 요양원이 여기였니다. 사전에 연락이 었던지 간호사 두 분이 나와 있더군요. 할머니는 휠체어에 옮겨 타시고 저는 트렁크에서 여행 가방을 꺼습니다. "요금이 얼마 나왔어요" 하고 물으시길래 제가 그랬죠. "할머니, 오늘만큼은 무료입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그래도 양반아, 기름값은 받아야지" 하시더군요.


제가 웃으면서 말씀드렸어요. "괜찮아요, 할머니.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울게요." 그러자 할머니는 수그린 저를 꼬옥 안아주셨어요. "늙은이의 마지막 여행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하시면서. 저는 할머니에게 요양원 주소가 적힌 종이를 돌려드리면서 "마지막, 할머니. 또 여행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부르세요. 여기 제 연락처를 적어 놓았요" 라고 말씀드렸답니다.



뉴욕의 옐로 캡은 1만 4천여 대, 다른 종류의 택시를 모두 합친 전체 택시 기사는 약 4만 명 정도라 한다.


날 저는 착잡한 마음에 정처 없이 차를 끌고 돌아다녔지요.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어떤 고 싶지 않았어요. 그날만큼은 제가 택시를 모는 게 한 일이구나 싶더군요. 차를 돌리지 않고 터폰을 눌렀던  오지랖이 기도 했고요. 교대 시간이 훨씬 넘었지만 신경 쓰이지도 않았요. 건강하시라는 말을 못 해드렸던 게 마음에 었죠. 하긴 저도 경황이 없었으니요. 여기까지 말하던 택시 드라이버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팔을 구부려 시계를 확인하더니 후다닥 걷어붙였던 소매를 풀어 내렸다.


잊고 있던 게 생각났거나 마음속으로 해놨던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이야기꺼냈나 싶을 수도. 어쨌든 배터리는 넉넉하게 충전되었했다. 마침 나도 아이가 나올 참이다. 그나저나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해졌다. 소 하지 않던 뚱한 생각만 연달아 들었다. 음 주 아이를 따라 들어가 피아노 연주를 는 건 어떨. 따가 조갯살 수프 통조림을 데워먹고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저 읽어야지 하는 식의. 괜한 어색함에 나는 발 뒤꿈치로 애먼 화단 툭툭 찼다.  택시 드라이버가 불쑥 마지막 문장을 던졌다. 별인사 대신.


"...... 러다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요. 할머니 돌아가신 걸 알리지 못했다면서. 남긴 물품이 거의 없는데  이름이 적힌 연락처가 하게 성경책 사이에 끼 있었다고."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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