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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도 능히 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 자유케 되게 도와주세요.

by 김혜진


20250218.화 / 눅 9:37-45



> 묵상

한 남자가 귀신 들린 외아들의 치유를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사실을 예수님께 전달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치유하신다.

그리고는 또 귀에 담아 두라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 하신다.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고, 능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걸 꾸짖으시곤 하신 다는 말씀은 또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말이다.

“아니, 넌 이것도 못해? 내가 할 수 있게 능력을 줬잖아?” 봐봐- 하면서 보여주시더니

“잘들어. 나중에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게 될거야.”

예수님이 하시는 두 말씀 모두 사실이지만 도대체 무슨 상관이길래 계속 손에 넘겨짐을 말씀 하시는 건가?

그것이 능력을 능히 해내지 못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난 이것이, 한 존재를 온전히 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귀신들린 소년을 치유하려면 그의 귀신들린 상태에 피해입을까, 혹시나 그 귀신이 나한테 오면 어쩌나의 두려움 따위라던지

귀신 들린 모습에 대해서 기피하며 피한다던지 하는 것들의 두려움 말이다.

결국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 그것을 강조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에게 넘겨져 결국엔 우리 곁을 떠나실 것도 사실이시기 때문에

“난 나중에 떠날거야. 그러니까 이 몫은 이제 나를 믿는 너희들의 몫이야.”라고 재차 말씀하시는 거 같다.



하지만 아직은 제자들이 감당 할 수 없어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제자들 역시 막연한 두려움에 묻지도 못한다.


오늘도 일용직 사무소에 갔다가 일이 없어 돌아온 남편이다.

실직의 모습을 2년째 보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라는 적용에 무엇을 어떻게 알아보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봐도 없다고만 하고,

집에서 눈치가 보이니 집안인을 하는데 집안일을 하면서 뭐가 대체 못마땅한건지 모르겠지만

인상을 쓰고 한숨을 나에게 쉬는 걸 보면 ‘대체 뭘 바라는건가? 말을하지 왜 저딴식인가?’ 생각이 들면서 울화통이 치민다.


그럴거면 집안일 하나도 안해도 되니까 바깥에 나가 있으면서 나랑 마주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눈치도 안주면 좋겠는데 어딜 가지도 않는다.


열심히 다니던 운동도 이핑계 저핑계로 안간다.

그리곤 하루가 24시간이라면 핸드폰을 손에 떨어트려 잠들기 전의 시간을 제외하곤

계속 핸드폰으로 숏츠와 만화 웹소설 따위를 본다.

그 광경과 에너지를 집에서 보고 있으면 질식해 죽을 거 같다.

이 광경을 아이들도 함께 본다는 게 실직하게 만드는 포인트다.

애들은 일은 구하는지 안구하는지 잘 모르겠는 아빠가 핸드폰 중독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난 가장으로 능력없는 아버지상을 남편으로 절대 맞이하고 싶지 않았었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너무나도 다정했지만 가장 역할을 엄마가 해오는 걸 평생 봤다.

엄마는 가장 역할을 하며 삶이 지쳤고, 짜증과 화가 늘 넘쳐났다.

그래도 감사한건 엄마도 아빠도 외향적이라 엄마는 일하는 시간 외에는 친구들과 만남을 가졌고,

가장으로서 무능력한 아버지를 집에서 하루종일 보고 있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정말 원치 않던 아버지상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핸드폰 하는 모습만 보여주며 온종일 집에 있는다.

도파민 귀신과 집귀신이 있다면 남편이 그 귀신들린 자란 생각이 들 정도다.


나에겐 남편의 도파민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없다.

예수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이 문제는 내가 남편이란 존재를 끌어안지 않아서,

그런 남편의 도파민 귀신같은 미친 모습에 피해 입는게 싫고 내 쓴뿌리가 건드려 지는게 싫고

엄마를 비롯해 나까지 2대의 상처를 헤집어 놓는게 열받고

자녀들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는 게 짜증나는

남편의 도파민 귀신들린 모습으로 피해입는 나만 생각하고 있으니 나는 이 문제를 능히 해결하지 못한다(40).


예수님이 떠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능력을 주신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내 옆에 있는 그 존재들을 십자가에 매달린 사랑으로 사랑해 주라는 말인건데

그걸 못하고 있으니 우리집에서 도파민 귀신은 떠나지 못해 남편에게 착 엉겨붙어 있는게 아닐까?


이걸 깨닫는다고 남편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질 용기와 힘은 내게 없다.

그냥 내가 못하는 걸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던히 애쓰는 하루만 있다.




> 삶

남편의 핸드폰 하는 모습이 죽을 거 같으면 영상면접을 마친 후 도서관에 가있거나 1층에 있겠습니다.

큐티하고 기도하기



> 기도

주님, 제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셨어도 능히 못합니다. 그렇게 능히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게는 남편을 품기위해 죽기까지 사랑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편을 위해 죽기까지 하고 싶지 않고 죽는 척 정도만 하는 것도 억울합니다. 그 죽는척 정도로 남편이 치유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제 상처를 건드리고 우리 엄마의 상처를 건드리는 무능력한 모습의 가장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들의 연이은 각기 다른 종류의 무능력을 본 제 아이들의 마음도 안타깝습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가 이 무능과 나의 욕망과 상처 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우리가 하나님만 따르는 것들의 길이 되게 인도하시고 저는 남편의 부정적인 상호작용도, 도파민 중독도 막을 수가 없사오니 주님이 해주세요. 오늘도 남편을 보고 있으면 죽을거 같은 제 속을 치유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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