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머무르는 것
25.03.11, 화 / 눅 14:1-14
> 묵상
예수님은 안식일에 아픈 자를 고치신다. 안식일에 어떠한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한 존재에 대한 생명과 그의 아픔에 반응 하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2)…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5)’
예수님은 설명보다 지금 수종병자의 아픔을 먼저 보시고 거기 머무르시고 치유하신다.
그리고 나서 묻는 이들에게 설명을 하신다.
내게 부족한 태도가 바로 이런 것 같다.
한 존재의 아픔과 생명에 반응하는 것보다 어떤 행위와 설명이 우선이 된다.
어제 뜰에랑도, 숲에랑은 어느 순간 부터
자녀들의 아픔에 반응하기 보다 어떤 해결방법이 우선이 되고,
불편감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그걸 해결하기 위한 설명과 그에 따른 행동위주로 대화한다.
불편감에 머무르지 못하고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며 고군분투 하게 되고,
누군가 행여나 불편할까 눈치 보게 된다.
2주전 수련과정 중 이루어지는 내담자 경험을 통해 알았다.
눈치를 과하게 보고 있다는 것, 그 눈치라는 문을 통해 내면을 조금씩 탐색할 수 있었다.
수종병 든 한 사람의 수종병을 통해 예수님이 그의 수종병을 들여다 보시고
안식일에 행위보다 사랑으로 그를 고쳐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나의 병든 내면을 통해 날 들여다보게 하시고,
하나씩 그것들을 사랑으로 고쳐 주신다. 감사하다.
이런 사랑을 받았고 받고있고 앞으로도 받을 것인데
자꾸만 병든 것이 치유되면 높은 자리를 택하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한테 병든 모습이 안보이는 자리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수종병이 없었던 것처럼,
있었어도 그냥 높은 자리에서 이미 다 극복한 것 마냥 더이상의 수종병은 없는 듯 괜찮은 척 타자들을 보고싶지 낮은 자리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9) .. 청함을 받았을 때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10)’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날 향한 찔림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부분이 내가 아픈 부분이었을 때 마치 끝자리로 억지로 끌려 내림 당하는 기분이 든다.
난 괜찮은데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그러나 인본적인 관점에서도 상담을 그렇게 무수히 받아보고 나서인 지금에서야
겨우 1겹 안으로 들어간 거 같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깜깜한 우주처럼 미지의 영역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뭘 다 아는 양, 깨달은 양, 모든 통찰을 가지고 있는 자처럼 오만하게 행동하게 될까?
아픈 내가 아프다고 할 수 있는 것,
아팠다 나은 고침받은 부분이 있어도 그게 다가 아닌 겸손이 나에게 존재한다.
그리고 애초에 예수님은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12)’하신 것처럼
삶을 나누는 것도 갚을 길 없는 자에게 하듯 하는 것이 복이 있다 하니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돌아오는 피드백이 불편감을 줘도 애초에 나는 받을 것 없는 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었으니
그런 상황을 기이히 여기지 않길 기도한다.
> 삶
1.목장에서 어떤 소리를 들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내가 원하는 모양을 받기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기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번 주 나눔 피하지 않고 말하는 것)
2.왜 계획한 것이 틀어지면 감정이 올라오는지, 어떤 대상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느끼는 책임감은 무엇 때문에 자꾸만 과하게 작용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주님이 알려주시고 치유해 주시라고 기도하기
> 기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눈치라는 문을 달고 사는 자였음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눈치라는 문이 불편하지만 그걸 통해 저를 알아가게 해주셔서 그또한 감사합니다. 알지도 못한 채 병들고 있던 제게 찾아오셔서 머무시고 만지시고 치유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라는 존재를 느끼고 함께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처럼 저또한 어떤 행위나 설명이 우선이 아니라 자녀들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며 머무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아닌척 높은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제게 맞는 끝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인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