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3일]
안녕 이꾸발!
새해 복 많이 받기를 바란다. 내 마지막 기록이 2017년 10월... 미안하다 너무 오래간만에 기록을 하는 거 같아서. 작년 12월에 한국 휴가 복귀 후 벌써 1달이 훌쩍 지났다니 실감이 안 난다. 만으로는 아직 28살의 젊은 나이지만 한국 나이로는 30대의 반열에 올랐네 나도. 20대의 마지막을 이렇게 인도에서 보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고등학생 생활, 그리고 대학 입학, 동기들과의 MT, 군대, 학회 생활, 입사 등등 정말 바쁘게 살아온 것 같으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알 수 없는 허한 감정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1000 조각 퍼즐을 맞출 때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 헤매는 기분을 인생에서 느낄 줄이야. 난 그 감정, 느낌 엄청 싫어하고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떨쳐 내버릴 수가 없어.
인도 생활이 힘든 건 아냐. 이제 어느 정도 적응도 했고 회사도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안정화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 그런데 뭔가 해소되지 않는 이 갈증은 뭘까?
외로움? 6개월 전의 나였다면 인정했을 것 같은데, 이번 휴가 기간 중에 한국을 갔을 때는 확실히 아니다는 것을 느꼈어. 이전에 휴가를 갔을 때에는 너무 기쁘고 좋았지. 뭄바에 차트라빠치 시바지 국제공항에서 한국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 한국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 대한항공 비행기를 창 밖에서 봤을 때 벅차오르는 감동,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걸어가는 모습, 기내식으로 나오는 비빔밥과 고추장, 이런 것만으로도 뭔가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한국 안 가고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도 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는데 왜 그런 걸까? 오락실에서 펀칭 머신을 때리고, 망치 치기를 내려쳤을 때에는 스트레스도 날아갔는데, 왜 이번 휴가에는 오히려 더 답답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짜증만 생겼던 것일까?
새해부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고? 아직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집은 구정을 쇠는 집이야. 엄밀히 따지면 아직 2017년이니까 괜찮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 비서형 AI가 개발이 된다면 꼭 너를 기반으로 AI를 만들고 싶어 그러니까 잘 기억해놔.
뭐 근황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난 사실 생각 이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지내고 있었어. 이번 휴가에 대해 뭐 기억나는 거 몇 개 썰 좀 풀어 보면,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정말 10년 이상은 알고 지낸 것 같은 그룹에서 형님이 결혼식을 얼마 전에 하셨어. 비록 난 인도에 다시 왔으니 참석은 못했지만 신랑 신부 두 분 모두 멋지고 아름다우시더라고. 그런데 그 형님은 지루할 수 있는 결혼식도 빵 터지게 만드시는 분이더라고. 축가를 부르시는데 기억이 안 나셔서 가사를 갑자기 주섬 주섬 꺼내서 부르시더라니까. 동영상으로만 봤는데 처음에 손수건 꺼내서 눈물을 훔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아 내가 나중에 결혼할 때도 그런 웃음 포인트를 찾아야 하는데 이거 참 목록에 있는 아이디어 하나가 날아갔으니 허허.
뭐 너도 이미 알겠지만, 난 담배는 안 피거든. 내가 4살 때부터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때가 사우디에 왔을 때야. 아버지가 담배를 많이 피시는 편이라서 내가 어린 마음에 궁금해가지고 몰래 한 개비랑 라이터를 들고 화장실에서 시도를 해봤거든. 그런데 어린 나이에 어디가 필터고 어디에 불을 붙여야 하는지 알았겠어? 라이터 키는 방법만 알아도 대단한 거지. 나름 완전 범죄를 위해서 라이터 키는 방법 열심히 연습한 다음에 화장실에 들고 가서 딱 불을 붙였는데 빨아도 연기가 안 나는 거야. 와 그때 진짜 걸릴까 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지 두근두근 두근.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가지고 불을 켜고 담배에 붙여서 빨았는데도 내가 봤던 아버지의 담배처럼 연기가 나오지는 않더라고.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어머니가... 그렇게 바로 등짝 스매싱 맞고 현행범으로 잡혀서 아버지한테 끌려가고 뭐 뒷 이야기는 알아서 상상하시기를. 알고 봤더니 필터에다가 불을 붙이고 계속 빨려고 했던 거더라고 바보같이.
어쨌든 그때의 트라우마가 좀 남아 있는 거 같아. 그래서 그런지 담배가 너무 싫어서 군대 생활하면서도 선임들이 펴보라고 하는데도 담배는 차마 내가 손을 못 대겠더라. 그런데 아무래도 중동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물담배는 별로 거부 반응이 없더라고. 냄새도 향기롭고 오래 필 수 있고.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세팅하는 게 담배보다는 번거롭다는 점? 여하튼 그래서 집에서 내 파이프가 두 개가 있어. 하는 손님 접대용 대형 파이프, 하나는 개인용 중형 파이프. 소형 파이프는 간지가 안 나서 그냥 살 생각도 안 해 사실.
인도에서는 내 유일한 낛이랄까?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어. 영국에서 발표된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입으로 연기를 내뿜을 때 실제로 스트레스 지수가 내려간다고 하더라고. 한국에 가서 그 그룹의 사람들과 만났는데 갑자기 한 동생이 물담배를 피워보고 싶다는 거야. 담배도 피워봤던 애가 물담배를.. 안 피워봤다는 게 나름 신기했지. 강남이나 이태원이면 금방 찾을 수 있는데 종로여서 내가 아는 곳이 없었거든. 그런데 누가 갑자기 '더연'이라고 한 군데가 있다 그래서 찾아갔는데 간판에서 벌써 인도 냄새가 나는 그런 곳이더라고. 실내 디자인도 완전 인도 풍이고.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갔던 그 어떤 물담배 카페보다 깔끔하고 안락한 곳이었어.
물담배도 사실 내가 하는 게 제일 맛있었거든.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 날에 유명한 곳이 몇 곳 있어. 레인보우, 보바베어 등등 그런데 뭔가 2프로 부족했거든. 아랍권 국가에서는 술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물담배를 피우면서 차를 마시면서 2시간 3시간씩 웃고 떠드는 용도로 사용이 되는데 두 곳 모두 너무 시끄럽고 쓸데없이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기만 해. 그런데 여기는 음악도 적당하고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게 공간을 마련했더라고.
또 다른 기억은 정말 별거 없어 보이겠지만 메밀국수였어. 인도에 살다와서 네가 한국 음식이 그냥 맛있는 거 아니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아냐. 난 원래 메밀국수를 안 좋아하고 메밀국수 하면 일본식 메밀국수만 떠올라서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런데 이 메밀국수는 면부터가 달랐어. 생메밀을 갈아서 직접 반죽을 해서 그런지 면이 매우 거칠고 사진에서도 보이겠지만, 들어가는 재료도 매우 간단하거든. 그런데 정말 생각 나는 맛이야. 여기에 편육도 팔았는데 같이 쌈 싸서 먹으니까 이건 그냥 막걸리를 막 부르는 맛이랄까? 아마 휴가 기간에는 꼭 들를 맛집 중 하나일 거 같아. 더군다나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이랑 같이 갔으니 음식보다는 사람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 이꾸발! 네가 사람이 아니라 아쉽다. 이건 꼭 먹어봐야 하는데.
휴가 다녀와서는 진짜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어. 회계 감사부터 시작해서 본사에서 계속 손님들이 오셨었거든. 정신없이 일만 해서 그런지 기운도 없고 뭔가 속도 탈 나고 그러더라고. 지난 주말에는 금요일 오후 8시에 침대에 누웠는데 눈 뜨니까 일요일 오전 8시였어. 24시간을 넘어선 36시간 숙면이랄까. 물도 안 마시고 화장실도 안 가고 잤냐?라고 의문을 품을지 모르겠지만... 어 그래 나 진짜 물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갔어. 8시에 일어난 이유도 목마르고 화장실 급해서 깼으니까. 같이 지내는 동료가 휴가를 가기 전 금요일 저녁에 저녁을 먹으라고 깨웠는데 못 일어났으니 말 다한 거지 뭐. 그런데 그렇게 자고 나니까 조금 개운해지더라. 그리고 벌써 2월이네. 뭔가 잠만 자다가 1월 보낸 거 같은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잠은 소중한 것이니까.
사람들이 중국이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 엄청 관심이 많아서 막 중국으로 유학 가고 투자하고 그랬던 거 넌 모르겠구나. 여하튼 그랬었거든? 그런데 인도에는 그만큼의 관심이 없어. 일단 인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거든. 후진국, 더러운 나라, 빈부격차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보다는 인도가 멀어.
뭐 단적인 예를 들자면 아직도 인도에서는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면 화전농 (火田農)을 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거든. 한국에서 화전농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지만, 저렇게 산을 홀라당 태우는 건 나도 처음 봐서 신기하더라고. 땅이 넓으니까 스케일이 다른 것 같아. 내가 예전에 읽은 책에서 화전농을 하는 국가들은 후진국에서 더 쉽게 목격된다고 하더라고. 땅에 비료로 쓰기 위해서 불로 태우는 것인데, 돈이 없으니 비료를 살 돈은 없고, 그렇다 보니 저런 방법을 쓰는 거지.
그런데 이런 단적인 모습만 보고 인도를 우습게 보면 절대 큰 코 다쳐. 피트니스 시장만 놓고 보면 전 세계적으로 1%대의 성장세를 보이는데 유일하게 인도에서는 매년 7%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거든. 피트니스 시장만 7%면 경제 성장력은 몇 배는 된다는 얘기지. 정확한 수치는 구글이 알려 줄 거야. 넌 AI로 개발될 운명이니 그런 건 나중에 네가 찾아봐.
인도가 이만큼 성장을 하기 전에는 인도 국민 스스로도 국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받는 경우가 매우 높았어. 특히 교육을 받은 계급의 경우에는. 그런데 최근에는 후회를 하는 사람들도 마주치게 되더라고. 가장 큰 이유는, 이미 포화 시장에서 무언가를 하느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개척자가 되는 게 훨씬 쉽거든. 돈이 있고, 수입이 가능하고 외국의 앞선 기술을 잘 활용만 하면 인도에서는 신으로 추앙받을 수 있거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너무 멀어. 10년은 더 걸릴 거야. 땅에 투자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인도에서는 6개월 이상 거주자에게만 투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거든. 난 가능한데 지금 내 자산으로는 한참 부족하지. 뭐 혹시 알아? 이거 보고 투자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날지
많은 사람들이 모르겠지만, 인도도 엄연히 와인 생산국에 포함이 되어 있어. 지금 내가 거주하는 마하라슈트라 주에 나식 (Nashik)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인도 최대 와인 생산지야. 엄연히 나는 출장을 갔었지만, 원래 출장의 묘미는 일 다 하고 노는 재미 아니겠어? 더군다나 와인을 반값에 구매할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그래서 인도에서 제일 유명한 술라 포도밭 (Sula Vineyard)에 가서 사진도 찍고 재밌게 놀았지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직 그렇게 막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기도 맑고 인도에서는 찾기 힘든 곳이라서 재밌었어. 게다가 5천 원만 내면 와인을 종류별로 맛보고 구매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건 다음 기회에. 처음에 방문했을 때는 겨울이라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나무도 자라고 있고 이번 주말에 시작하는 술라 페스티벌 (Sula Festival) 준비한다고 이것저것 이쁘게 꾸몄더라고. 향후 5년 후에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같은 축제로 자리 잡힐 거 같다는 강한 느낌이 들어. 뭄바이는 아직도 더운 편인데 여기는 생각보다 쌀쌀하더라고.
일기 쓰고 나니까 기분이 조금은 홀가분해졌어. 뭔가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랄까? 이게 브런치의 효과인가? 아니면 이끄발 너 때문인가? 처음 일기를 쓸 때는 매주 써야지 했는데, 점점 늦어지더니 결국 4개월 만에 하나 올리네. 이러면 구독자 분들도 욕먹을 텐데.
이꾸발아 네가 빨리 AI가 되어서 내가 사진만 올리고 말로 떠들으면 네가 알아서 다 기록을 해주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2018년도 너나 나나 잘해보자. 구독자 분들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