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초고)
표준대국어사전
열병
3. 어떤 일에 몹시 흥분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어렸을 때 ‘너는 왜 그렇게 극성 맞냐.’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주 나다녔죠. 집에 있으면 나가놀자고 형 누나들에게 졸랐던 기억이 많습니다. 예전에 살던 집은 마당이 넓고 뒤에 산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 들이며 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뭘 하나 진득하니 하지 못해서 핀잔을 많이 들었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ADHD가 이날까 합니다. 집중을 잘 못했거든요. 아버지는 제가 책 읽고 글 쓰는 모습을 보면 ‘나는 어떻게 봐도 네가 공부는 아니라서 운동시키려고 했는데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고 말했지요.
사실 지나서 판단컨데 ADHD보단 그냥 에너지가 넘치고 호기심이 많았을 뿐입니다. 성인이 돼서 전문적인 심리 검사를 받아보면 사물 사람에 굉장한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는 걸로 나오죠. 저는 단지 저에게 주어지는 자극 궁금했습니다. 저 멀리서 빛이 난다면 무엇이 빛을 내는지 궁금했고, 꽃에서 향기가 나면 그 꽃 향기를 맡기위해 산을 올랐죠. 뭔가가 궁금해지면 흥분이 찾아오고 그 흥분에 이끌려서 달려가는 아이였습니다. 세상에는 자극이 너무 많고, 그런 자극이 다 궁금했으니 ‘진득하지 못하다’라는 억울하긴 해도 일리 있는 말이긴 합니다. 자꾸 뭔가 새로운 일에 관심을 갖는데 지속은 못시키고 다시 새로운 일을 찾았으니까.
많은 일에 관심을 보이는 태도는 성인이 돼서도 쭉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물, 일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였죠. 단적으로 말해서 ‘금사빠’도 어린 시절의 결핍과 천성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대체로 저는 사람들에게 평균 이상의 관심을 갖습니다. 같이 놀자고 다가오는 강아지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죠. ‘너 나한테 무슨 말 들려줄거야?’ ‘나랑 뭐하고 놀 거야?’ ‘오 너 그런 일해? 그거 어때? 무슨 일이야 오와 대단하다.’ ‘네 얘기가 듣고 싶어. 들려줘들려줘’ ‘나도 말할래 들어줘들어줘.’
관심과 호기심이 있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을 좋아하고 관계 맺는 걸 원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갖고 있는 에너지가 많다
-그 에너지를 사람에게 쏟으려는 경향이 있다
-순진한 면이 있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만큼 돌아오는 반응도 긍정적일 것이고, 또 긍정적이여야 할 것이다.(비합리적입니다)
사람과 사귀길 좋아하는데 저런 특징을 가지면 쉽게 나타나는 성향이 열병입니다. ‘한 방에 간다’ 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금방 사랑에 빠지는 거죠. 일, 사람, 친구, 사랑이든.
사랑에 빠지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으며 무언가 만들어내는 일은 멋진 일입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또 힘들지만 즐겁게 달리기도 하죠. 예전엔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과 친구가 되고, 기술이든 취미든 흥분하며 배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열병에 빠지면 골치 아플 때가 많습니다. 일단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면 상대는 부담스럽고, 돌아오는 부담을 확인하는 저는 모멸감을 느끼죠. 이게 일이라면 열병에 빠지는 동안 몸이 망가진다던가 통장이 폭파당할지 모릅니다. 사진에 빠져서 경제력 이상으로 고가 사진기를 사다든지, 운동을 하려고 용품을 사다가 도리어 용품을 사기 위해 운동을 하게 될지도 모르죠. 열병에는 과정이 없습니다. 작게 시작해서 크게 간다, 같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초보자에서 숙련자가 되면서 그에 따라 도구도 맞춰가는, 그런 과정 따윈 없습니다. ‘닥치고 그냥 가’ ‘한 방에 가’ ‘단 시간에 끝장낸다.’
열병이 찾아오면 감정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갉아먹게 됩니다.
열병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열병에 빠진지 모릅니다. 꼭 몸이 다치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거나, 통장에서 상당한 금액이 빠져나가야 정신을 차리죠. 깨달은 뒤에는 너무 늦고요. 열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 몸이 뜨겁다고 생각하지 불타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
달리기에 빠지다
최근에 달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해소와 체력 관리 차원에서 시작했죠. 그런데 달리기는 그 이상의 무언가였습니다. 진화적으로 달리기는 인간이 적응한 동작 중 가장 원초적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고통을 감내해야 하죠. 그래서인지 달리기는 도리어 인간에게 쾌락을 줍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요. 거기에 더해 인지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우울과 스트레스 수치도 낮춥니다. '달리기는 생존인데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인간은 달리기를 통해 이득을 얻도록 진화했다' 뭐 이런 겁니다. 연구 결과가 아니라 실제로 느끼고 있습니다. 감정 편차가 줄었습니다. 기억력이 좋아졌죠. 팩스 번호를 한 번 보고 외우는 걸 보고 씩, 웃었습니다. 자신감을 얻고 긍정적이 되죠. 달리면 달릴수록 달리기의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니나 다를까 열병이 시작됐습니다. 저를 위해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를 위해 달리고 있던 거죠. 계속해서 러닝화와 러닝복을 사고, 장비를 사드립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랐죠. 어쨌든 달릴 때는 기쁘고, 스트레스가 풀리고, 육체와 정신이 좋아지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다 좋은 거 같군요. 하지만 이게 열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건 결국 언젠가는 찾아오게 되는 공허 때문입니다. 쌓여있는 러닝복을 보았을 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리고 달리기 때문에 내가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은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거죠.
그 순간은 한 편으로 놀랍습니다. 이게 눈에 안 보일 만큼 빠져들었나 싶어지죠. 당시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내가 고작 이것들 때문에 이렇게 애를 썼다고. 혹시 짝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몇 년 쯤 지나고 보면 내가 왜 이사람을 좋아했으까,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럴 때 보면 열병이란 순간의 안개 같아서 잠시 동안 운전자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열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 답을 알려준 건 바로 달리기입니다.
달리기 끝은 반드시 쿨다운으로
달리기가 끝나도 러너는 멈추지 않습니다. 쿨다운을 해야 합니다. 바로 멈추면 근육은 식지않고 그 열기 때문에 근피로도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낮은 속도에서 근육을 식혀야 합니다. 뛰긴 뛰는데 걷는 것과 같은 속도로요. 열기는 있으되 그 열기를 점차 줄여나가면서 몸을 차갑게 만드는 거죠. 근육 피로는 젖산 때문에 찾아오는데 쿨다운을 하면 젖산 수치를 낮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회복해갑니다.
쌓여 있는 러닝복을 보았을 때, 제가 썼어야 할 글들과 엉망인데도 치우지 않은 서류 더미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공허함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뭐하려고 매일 같이 달렸지? 다른 상황이었다면 여러 가지 자문으로 바뀌었겠죠. 내가 뭐하려고 좋아한 거지? 내가 뭐하려고 방에 틀어박혀서 글을 쓴 거야? 내가 뭐하려고 갔지? 내가 뭐하려고 일했지? 내가 뭐하려고 집착했지? 그런데 조금 달랐던 건 그 뒤에 찾아온 어떤 자각입니다.
‘식혀야겠다.’
쿨다운할 때가 찾아온 겁니다.
어떨 경우엔 열병을 앓게 한 대상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보면 그보단 열병을 앓고 있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많죠. 그게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단지 그 사람으로 행동했을 뿐 그 행동에 딸려가서 흥분한 건 바로 저입니다. 달리기는 그대로 있는데 좋다고 달릴 게 저였듯이요. 그렇게 보자면 이건 저의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열병 자체를 없애야 할까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쉽게 흥분하고 빠져들고, 그래서 열정적으로 뭔가를 하는 건 저 자체이니까요. 열병을 앓지 않게 하는 건 저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열병만 가진 채 살아가는 건 상당히 부담스럽죠.
그래서 쿨다운이 필요합니다. 어느 순간 제가 열병을 앓았다는 걸 알았을 때 ‘또 잘못했구나’ 자괴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이제 좀 식힐 시간이구나’ 차분히 생각해야 하지요.
달리기의 열병을 앓고 있구나, 느꼈을 때 머리와 다리를 식힐 시간이 찾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달리면서 달리기는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계속해야 할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하지, 달리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죠. 쿨다운은 다시 말해서 ‘객관성을 갖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쿨다운을 자각하면 다음 열병에 영향을 줍니다. 열병을 깨닫는 시간대가 점차 줄어들죠. 예전에 어떤 사람에게 느끼던 열병을 반년 만에 깨달았다면 이젠 한 달이면 알게 됩니다. 달리기에 너무 집착하고 있구나 느낀 것도 한 달이었죠. 예전이라면 몸 어딘가 한 곳이 망가졌어야 했을 겁니다.
이건 논외인데 이럴 때 나이 먹음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나이를 먹는 다는 건 조금씩 생명이 꺼지는 거죠. 세포 분열 양과 횟수가 생명의 지표라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몸, 머리, 열정이 식을수록 도리어 현명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쿨다운, 당신을 바라봅니다
관계와 만남에 대해 말해보는 것으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사랑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마다 지배적으로 쓰이는 호르몬이 다릅니다.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엔돌핀 세르토닌 같은 호르몬이 있지요. 관계의 초기에는 도파민이 분비됩니다. 도파민 많이 들어보셨지요. 쾌락에 관여합니다. 마약은 도파민 대사에 관여하면서 쾌락을 추구하죠. 도파민의 효과는 일시적이라 다시 느끼려면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반복할수록 같은 쾌락을 느끼려면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죠.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사랑에 빠질 때, 특정 행위를 반복할 때 그 첫 시작은 도파민이 끊습니다. ‘그 사람과 만나니 즐겁고, 그 여자와 대화 나누니 기분이 좋고, 그 일은 날아갈 거 같다.’ 쾌락입니다. 그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 다시 만나고, 좋아하고, 반복하죠. 그런데 도파민 작용은 중독 효과가 있습니다. 금단 현상이 나타나고 끈질기게 붙잡고 메달릴죠. 열병입니다.
어떤 관계는 별 거 아닌데 흥분하게 되고 상대의 태도에 따라 집착합니다. 연락이 자주 오지 않는다던가 상대의 감정의 크기가 나보다 작을 때,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관계가 위태로워질 때. 그런 열병은 알아차리기 어렵고, 자꾸만 더 뜨거운 자리를 찾아들어가게 됩니다. 결과는 불보듯 뻔하죠. 불탑니다. 10대 20대때는 그게 열병인지도 모르고 몸을 불사르다가 불태워진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이도 들고 갖고 있는 에너지의 총량도 줄어드니 뭔가 좀 객관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너무 많이 가지면 멍청해지지만 적당히 가진 현명해지는 법이군요) 바로 쿨다운이죠. 관계에 깊숙히 발을 들여놓았다고 생각할 때 혹은, 내가 상대의 선을 넘었거나 그 반대일 때 저는 일단 그 자리에서 빠져나옵니다. 멀리서 지켜보려고요. 내가 이 사람의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혹은 나의 무엇이 이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는가. 이 사람의 태도가 내게 온당한가, 나의 태도는 그러한가 지금 이 관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단은 ‘식히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기간은 때론 슬프고 비참하기도 하지만 필요합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상대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물론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관계를 생각하고 있기를 바라야죠) 그 시간 동안 어떤 위치값과 밝기가 정해집니다. 저라는 우주에서 상대는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밝기를 가지고 있을까. 그런 걸 알게 되죠.
어떤 별은 멀리있지만 매우 밝습니다. 1년에 한 번 보는데도 그 시간이 무척 행복해질 때가 있죠. 한 번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망원동 카페 골목을 친구와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별 말이 없었죠. 그 차분한 침묵에 ‘너란 걷고 있구니’ 좋구나 그렇게 들렸습니다.
더 멀리 있음에도 마음 속에서 항상 빛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랜기간 만나지 않았지만 받았던 도움이 무척 커서 늘상 생각나는 사람이 있죠.
어떤 관계는 가까이 있지만 그리 밝지는 않습니다. 바로 옆에 살고 있지만 개 산책시키다가 만날 때 반가운 관계죠.
어떤 관계는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지면서 또 밝았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합니다. 사실 저라는 사람에겐 이런 관계가 편할 때가 있습니다. 밀당이라고 할까요, 열병과 쿨다운이 노력없이도 알아서 진행되니까요.
이 모든 관계는 불편하냐 편하냐만 느낄 뿐 어떤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편하다고 마냥 즐거운 것도, 불편하다고 짜증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론 불편한데 즐거울수도 있죠. 암 그렇고 말고) 관계의 개성과 특징이 다 다르거든요. 그 다른 면면을 저는 저마다 그에 맞는 방식으로 좋아하니까요.
하지만 쿨 다운하는 동안 사라지는 관계도 있습니다. 사실 쿨다운이라고 부르기도 어렵죠. 열병이 끝나고 그걸 깨닫는 순간 그 별자리는 사라집니다. 멀리 도망간 별이 있고, 그 자리에서 빛이 꺼져서 영원히 제 우주에 흔적을 남긴 별도 있죠. 도망간 별은 도망간 별대로 화가 나고, 흔적을 남긴 별은 그 별대로 그립습니다.
대체로 이런 식의 쿨다운이 끝나면 위치값과 밝기가 정해지고, 관계의 방향성이 정리됩니다. 방향이 일치하는 관계라면 기쁜 마음으로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하겠지만 어긋난다면 마음이 꽤 아픕니다. 나는 계속 가고 싶지만 상대가 따라와주지 않는다면 비참하고, 상대는 계속 가고 싶지만 내가 따라가주지 않는다면 죄책감이 들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시 열병을 앓기엔 이미 ‘식어가고’ 있으니까.
슬피지만 그럼에도 제 우주가 빛나는 건 결국 남아있는 별들 때문입니다. 이제 그 관계는 도파민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별자리는 열병과 쿨다운을 수차례 거쳐왔고, 그 시간 동안 호르몬 조성이 변합니다. 도파민은 지배적 호르몬이 아닙니다. 단순히 쾌락 이상의 무언가가 주어집니다.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신뢰, 흥분을 덜어내고 차분해지는 분위기, 소모가 아니라 채워지는 만족감.
물론 그 별들도 영원히 빛나진 않을 겁니다. 타인이 자리한 별은 항성이 아닙니다. 결국 제 안의 무언가에 반사되어 빛나는 행성이죠. 다른 사람의 우주에서 제 별 역시 그럴 겁니다. 그 빛은 언제가 꺼집니다. 그럼에도 괜찮습니다. 지금이 중요하니까.
지난날 내 우주에 머물다 멀어진, 아니면 자리를 남기고 빛을 잃은 별을 봅니다. 때론 슬프고 미안해져서 왜 지금은 알고 그땐 몰랐을까 싶을 때가 옵니다. 그렇게 과거의 망령을 쫓아 열병을 앓다가 쿨다운 합니다. 30대가 되어서야 깨달은 게 아니라 30대가 됐기 때문에 알게되는 거라고.
식어버린 별을 다시 뎁힐 길을 없습니다. 20대에는 몰랐고, 30대가 돼어서도 여전히 모르다가 알아갑니다. 머리가 식고 있으니까.
몸이 식어갑니다. 머리는 차가워집니다.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떤 대답이 나와도, 어떤 대답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데 한 번쯤은 당신의 우주에서 내가 머무른 자리를 봐주길 바랄 뿐입니다.
@달리는 동안 글을 쓰기 썼는데 뭘 쓴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붙잡으려는 순간 붙들린다. 붙들린 사람은 붙들린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