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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tPD Apr 24. 2023

환장의 예능 만들기

예능 프로그램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

KBS <걸어서 환장 속으로> 제작 발표회

#숨기고 싶은 나의 직업, 예능PD


예능PD라는 직업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직업이다. "그게 뭐 하는 직업이에요?"라고 물어보는 직업은 아니다. 다만 질문이 참 많은 직업이다. 


무슨 프로그램 만들어요?라는 질문에 ㅇㅇㅇㅇ만들어요. 대답해 주면 또 질문이 이어진다. 거기 출연자 ㅇㅇㅇ 어때요? 진짜 그렇게 웃겨요? 출연료는 얼마예요? 그거 다 짜고 치는 거예요? 리얼이에요? 질문 세례가 이어진다. 이런 질문으로 끝이 나면 다행인데 꼭 더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프로그램 시청률 잘 안 나오던데. 요새 다들 TV를 잘 안보잖아요. KBS 예능은 재밌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직업이 예능PD라고 밝히는 순간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대답해주다 보면 어느새 시청률 때문에 난감함으로 귀결된다. 프로그램 제목만 검색하면 시청률이 싹 다 나온다. 마치 내 성적표가 만천하에 까발려진 느낌이다. 


방송을 보지도 않고 연예 뉴스나 동영상 클립만 보고 평론을 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네 없네, 왜 그 출연자를 쓰냐? 어떤 프로랑 비슷하지 않냐? 자기는 다른 방송을 즐겨 본다며 한대 후려갈긴다. 


그래서 난 회사원이라고 대답하는 편을 즐긴다. 상처를 후벼 파는 이런 심문(?)을 당하기 싫어서다. 


KBS 예능드라마 <프로듀사>

#모두가 잘난 사람들, 예능PD


메인PD가 되어 소위 자기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데까지(입봉) 7~8년 정도가 걸린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에 PD 생활을 시작했다면 30대 중후반, 늦으면 40대 초에 첫 기회를 받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자기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할 기회는 생각보다 꽤 늦은 시기에 오게 된다.


거의 모든 조연출들은 메인PD가 되어 프로그램 론칭만 하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자신감을 넘어서 거의 확신을 한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가장 냉혹한 예능 비평가는 사실 조연출들이다. 선배들이 론칭한 프로그램들의 첫 방송을 보며 냉혹한 비평을 쏟아낸다. 자기가 만들면 다를 거라고 자부하면서!


그도 그럴 것이 예능PD들은 모두 잘났다. 다들 아는 것들은 어찌나 많은지 어떤 주제로든 한 시간 이상 떠들고 자리를 파하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 분야도 정말 다양해서 카이스트 공대생 출신에 영화 연출 전공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채워져 있다.


면면이 잘나고 아는 것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남의 말 안 듣기"이다. 나도 가끔 주변에서 남의 말 진짜 안 듣는다며 볼멘소리를 듣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엄마 말도 안 듣는데 네 얘기를 듣겠니?


남의 말 안 듣기는 장점으로 보면 독창성이나 개성 또는 뚝심으로 대변할 수 있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똥고집이다. 결과가 좋으면 전자요. 결과가 후지면 후자다.


https://guide.worksmobile.com/kr/images/tips-img-23@2x.png

#주머니 속 아이디어의 현실


조연출 시절을 지내며 메모장에 저장해 둔 주옥같은(?) 프로그램 기획안, 아이디어들. 만들기만 하면 초대박 날 거란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시중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찬다. 왜 저딴 걸 만들지? 라면서...


이 초안의 아이디어가 너무 신박해서 초대박 기획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히트를 친 예능 프로그램들의 면면을 보면 아이디어의 신선함 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동 시간애 1위 시청률을 자랑하는 mbc<나 혼자 산다>, sbs <미운 우리 새끼> 같은 예능은 아이디어가 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다. 


"독립해서 살고 있는 인물의 삶을 관찰한다"


이 두 프로그램은 재료는 같지만 먹는 방식이 다르다고 표현하고 싶다. 스튜디오에서 VCR을 씹고 뜯고 즐기는 관찰자들이 young한 <나혼자 산다>와 old한 <미운 우리 새끼>의 차이점이 두 프로그램을 다르게 만든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조합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오늘도 새로운 예능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혼산> = 혼자 사는 사람 VCR + 동년배 친구 같은 사람들이 VCR 관찰, <미우새> = 혼자 사는 사람 VCR +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 VCR 관찰. 조합만 조금 다르게 해도 전혀 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 


조연출 시기의 기획안 습작 노트는 주로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고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 많다. 불가능한 것의 이유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그렇다. 섭외의 불가능, 제작비의 불가능 심지어 CP 설득(?) 불가능...


"세상은 내 아이디어를 몰라줘! 다 바보 똥 멍충이들이야!"


https://static.wanted.co.kr/images/events/1924/ac811992.jpg

#고집, 설득, 양보, 타협


그래 한 번 개발해 봐!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상황까지 왔다면. 이제 똥멍충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똥멍충이는 CP, 국장, 편성국 그리고 제일 무서운 시청자다. 하나하나 만나서 설득하고, 양보하고, 뜯어내고,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프로그램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 한마디에 바뀌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프로그램을 론칭하기 위해서는 말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면 왜 재미있는지? 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지? 왜 광고가 잘 붙을 건지? 왜 이 시간에 편성해야 하는지? 왜 이 출연자를 써야 하는지? 왜 이 제작비가 필요한지....


사람들이 품은 의심에 대한 해명을 순전히 말로 해야 한다. 나영석, 김태호와 같이 성공한 예능 PD들은 참 말을 잘한다. 그래서일까? PD 시험을 볼 땐 작문, 면접이 중요하다. 지원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얼마나 잘 전달하는지 확인하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하나의 프로그램이 론칭되기까지 순전히 말로만 진행된다. 그리고 끝단에 숫자가 등판한다. 바로 제작비! 그리고 소수점까지 PD를 옭아매는 시청률! 말로 시작해 숫자로 평가받는 것. 낭만으로 시작해 살 떨리는 평가로 끝나는 것. 


자... 이제 말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 정해진 숫자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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