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로 바위 치기, 그래도 해야만 하는 것
내가 몸담고 있는 KBS는 엄청 구시대적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회사다. 지상파(흔히 공중파라고 잘못 말하기도 하는) 기술을 사용해서 송신탑에서 전파를 쏴서 안테나를 가진 수신기를 통해 영상이나 소리 신호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영상+소리로 받으면 TV, 소리만 받으면 라디오가 된다. TV와 라디오는 똑같은 기술이다. 라디오 기술의 원형이 1901년에 나왔다고 하니 122년 동안 잘 써먹은 셈이다.
기차나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나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소리가 웬 이상한 상자에서 들렸으니 당대 사람들은 얼마나 환호했을까? 작은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것을 하고 있는 현재 우리가 보기엔 코웃음을 칠 일이다.
방송사에서 쏘는 지상파를 통해(지금도 계속 쏘고 있다) TV를 보려면 V 모양으로 생긴 안테나를 TV에 꽂아서 이리저리 방향을 맞춰가며 최대한 노이즈 없는 각을 찾아서 봐야 한다. 이런 귀찮은 행위를 직접 수신이라고 한다. 난청지역이라고 하는 전파가 잘 닿지 않는 음역 지역에서는 화면이 춤을 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시청하는 가구는 거의 없다(아마 이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위 사진 참고)
요즘 보통은 IPTV나 케이블 TV 서비스를 이용해서 인터넷과 TV 시청을 한다. 요즘은 더 나아가 OTT나 유튜브를 통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콘텐츠를 소비한다. 진작부터 VOD의 시대인 것이다. *Video On Demand(주문형 비디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시대. 자유로운 취향의 시대. 그렇게 콘텐츠 시장은 다양성으로 넓어졌다.
예능 이야기를 하다가 왜 또 지상파 썰을 풀고 있느냐? 결국 시청률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다. 시청률을 이야기하려면 또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글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지금부터 걱정이다. 시청률 집계는 유튜브 조회수 100만 돌파! 이렇게 조회수를 카운트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흔히 시청률이라 하는 가구 시청률이란 전체 TV보유가구 중 해당 프로그램을 보는 가구 수를 %로 표시한 것이다. 점유율은 켜져 있는 TV 수상기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선 닐슨과 같은 리서치 회사에서 표본으로 선정한 가구의 TV에 집계가 가능한 장치를 설치한다. 보급률이 매우 높은 IPTV 시청 정보를 그대로 받으면 간편하게 집계가 가능할 텐데 리서치 기관에서는 이런 콜라보는 하지 않고 있다. 데이터는 수집되기도 하지만 가공(?)되기도 한다.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참 중요하니까 이해한다.
버릇처럼 자꾸 다른 데로 이야기가 새는데,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편성표 운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원할 때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프로그램 중에 시청자가 선택하는 프로그램만 집계되기 때문이다. 그 옛날 추석이나 설이 되면 신문을 가져와 재미있는 영화에 네모를 치면서 이건 꼭 봐야지~ 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지금 아니면 못 본다는 생각의 절체절명의 시청 행태가 반영된 것이 시청률이다.
내가 만들고 있는 <걸어서 환장 속으로>가 배정받은 편성은 sbs의 <미운 우리 새끼>라는 강력한 프로그램이 있는 시간대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10% 이상의 시청률이 나오는 일반 예능 중에 1위를 하고 있는 존재다. 게다가 <미우새>는 일요일 밤 21시에 시작하고 <걸환장>은 21시 25분에 시작한다. 부동의 1위 예능 프로그램인데 훨씬 더 먼저 시작하고 더 늦게 끝난다. 소위 덮어버린다. 보자기로 감싸듯이 덮어버리는 편성이 가장 상대하기 힘든 상대다.
<걸환장>에게 주어진 기회는 <미우새>의 시청자들이 잠시 리모컨을 찾는 찰나의 시간이다. 잠깐 다른 데를 틀었을 때 눈길을 사로잡아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어느 요일 어느 시간대나 1등 프로그램이 있다. 어느 시간대나 다 피 터지는 시청률 전쟁 중이다. <걸환장>이 들어가기 전 이 시간대는 sbs <미우새>, mbc <물 건너온 아빠들>, kbs <홍김동전>이 전쟁 중이었다.
1등은 <미우새> 2등은 <물 건너온 아빠들> 아쉽지만 3등은 <홍김동전>이었다. <홍김동전>이 평일 저녁으로 시간대를 옮기고 <걸환장>이 들어가기로 편성 정리가 되었다. 3등 자리였다. 말이 3등이지. 꼴등 자리. 이런 자리는 장단점이 있다. 단점은 넘겨받을 기존 시청자 수가 매우 적다는 것, 장점은 프로그램이 자리 잡는 동안 질타보다는 응원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잃을 게 없다는 도전자 정신. 나는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2023년 1월 22일 일요일, 1회 걸환장 2.9%, 미우새 10.7%, 물아빠 1.5% -닐슨. 수도권 기준-
2023년 1월 23일 월요일, 2회 걸환장 4.9% (전국 6%) 설 연휴 연속 편성
*방송사에서는 수도권 기준의 시청률 집계를 보고용으로 삼는다. 광고 판매와 직결되어 있다. 네이버 검색으로 나오는 것은 전국 시청률이다. 대동소이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첫 방송에 MBC를 3등으로 내려보내고 2등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설 연휴에 시작한 방송이라 2회를 다음날 바로 편성하여 조금 더 높은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설, 추석에 시작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기자들의 관심도가 높아서 기사를 많이 써주기도 하고 내용이 좋거나 의외의 인물이 등장할 경우 화제가 되기도 한다.
2회는 사실 변칙 편성이긴 하다. 심지어 <미우새>를 상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아무도 관심 없는 KBS에서 만드는 예능 프로그램이 조금이라도 시청률과 화제성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똑같이 칼을 잡고 싸웠다면 한 번의 공격도 못 하고 긴팔로 잡은 큰 칼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거리를 극복할 방법으로 돌팔매를 잡았다. 작은 돌멩이가 회전하며 만들어내는 엄청난 속도에 비밀이 있었다. 물체의 속도가 빨라지면 아무리 작은 질량이라도 힘이 커진다. 전쟁에는 정해진 룰이 없다. 어느 것도 정의가 되지 못한다. 살아남는 것이 곧 정의가 된다.
시청률. 소수점 한자리까지. 피를 말리는 전쟁. 편성표는 방송쟁이들의 전쟁터다. 시청자들의 선택받고자 하는 이들의 전쟁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