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희생이 빛을 발하는 힐링의 문화공간, 수원 뽈리화랑
오래된 이야기가 담긴 건물이나 인물이 주는 감사함과 위안이 있습니다.
수원의 화성행궁 부근을 걷다 보면 간간이 예스러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그중에서 종교적인 건물이면서도 독특한 외형의 건축이 건너편으로 보입니다. 올해로 설립 102주년의 북수동성당은 수원의 어머니 성당이라 일컬을 만큼 깊은 역사와 많은 이야기가 담긴 성당입니다.
이 성당의 4대 주임 폴리 장 마리 데지레 장 바티스트(Polly, Jean Marie Désiré Jean Baptiste)신부님의 이야기가 담긴 뽈리 화랑을 다녀왔습니다.
뽈리 화랑을 이야기하면서 북수동 성당과 뽈리 신부님 이야기는 당연합니다. 왕림 본당의 공소로 시작된 북수동 본당의 뽈리(Désiré Polly, 沈應榮) 신부는 프랑스에서 선교사로 파견 나와 당시 어려움 속에서도 수원 최초의 고딕 양식의 성전인 북수동성당을 지었다고 해요. 뽈리 신부님이 재임하던 시기는 서슬 퍼런 탄압이 난무하던 일제강점기였으니 신앙인으로서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무엇보다도 일제 치하에서도 성당 옆에 소화강습소를 열어 한글을 가르쳤는데요. 가난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깨우치고,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는 마음과, 천주교 교리를 통해 한층 더 성장시키려는 마음이었다고 해요. 그 후 소화강습소는 소화초등학교로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뽈리 신부님은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함으로 순교했고, 성당은 신부님을 위한 기념비를 마당 한쪽에 세웠습니다.
참고로, 북수원 성당은 정조대왕 사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수원과 인근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이 압송되어 고문과 처형을 당한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장소입니다. 수원화성에서는 병인박해 당시에도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고 해요.
세월이 지나 소화초등학교가 뽈리 화랑으로 바뀌었습니다. 2007년에 개관한 뽈리 화랑은 지금껏 뽈리 신부님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났고 지역 작가들에게 문화의 공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구 소화초등학교를 그대로 활용한 전시관 옆으로 나지막한 뽈리 신부님의 동상이 맞이해 주십니다. <뽈리 데시데라도 심응영 신부. 6.25 순교자> 이렇게 적혀있네요. 옛 교사의 형태를 그대로 지닌 석조건물인 전시관은 등록문화재 제69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문이 열려있고 교실 복도가 나타납니다. 복도에 발을 딛고 서니 문득 어릴 적 공부하던 교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요. 6개 교실의 2층 석조건물입니다. 2층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교실이 편안한 예술공간으로 변신했네요.
상설전시장에 발걸음 하니 다양한 작품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옵니다. 수채화, 유화, 공예, 조각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어릴 적 공부하던 옛 교실 분위기의 실내에 가톨릭 관련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옛날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었던 사람들의 당시 상황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들도 있었는데요. 순교자들이 박해받던 형구 등도 볼 수 있어서 단순히 작품 감상뿐 아니라 성지로서의 의미도 되새겨볼 수 있는 전시장이었습니다. 조각 작품으로 성모상이나 예수님상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집기들도 예술성 있는 공예작품도 전시되어 있네요.
예수님과 십자가, 김수환 추기경님과 교황님을 비롯한 성직자들과 순교하신 분들의 인물화도 볼 수 있습니다. 민화나 성화, 기도하는 모습의 작품이나 촛대 등의 소품도 예뻐서 소장하고 싶은 작품도 있네요. 뽈리 화랑은 이렇게 늘 상설 전시를 하고 있다고 해요. 수원의 미술가회 작가들이 참여한 다양한 작품을 상시 전시하고 있어서 언제든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답니다. 전시된 작품들이나 소품들은 직접 구매도 가능합니다.
전시장 창밖으로 북수동 성당이 내다보입니다. 북수동 성당을 둘러싼 풍경이 초가을 볕을 받고 있네요. 순교의 희생이 빛을 발하는 문화공간이며, 성지로서의 차분함과 평온함이 전해집니다.
화랑 밖으로 나와 뽈리 화랑 건물을 바라보니 현대식 근사한 갤러리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운치가 느껴집니다. 성당 앞뜰엔 성모상이나 십자가 아래서 묵상하는 분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성당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서든 순교의 거룩한 기억과 연결됩니다. 천주교 박해역사의 현장에 막상 서보니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신앙의 선조인 그분들의 희생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수원 구 소하초등학교 옆으로 기도하는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수원화성 로사리오의 길을 잠깐 걸으며 성당 앞마당 풍경을 느껴봅니다. 그 길에 가을을 알리는 꽃들이 예쁘게 피어났습니다. 아픈 역사를 가진 성지가 삶의 가치를 되짚게 하는 쉼터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수원이라는 도시 한복판에서 역사를 품고 있는 북수동 성당,
그리고 뽈리 화랑.
순교자들의 희생이 빛을 잃지 않도록 찾아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따뜻하네요. 아픈 세월을 덮어버린 성전에 와서 현대를 사는 이들이 묵상을 하고 날마다 평화를 전해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