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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Jan 25. 2019

오늘의 날씨

제주 로드

제주 날씨는 대체로 물음표다. 모든 것이 곧 지나간다. 변덕이 심한 탓에 일정이 어그러지기 일쑤라 불편할 때도 있지만 덕분에 제주 풍경은 매일 새롭다. 역동적인 섬을 온전히 체감하는 데는 걷기 만한 게 없다. 창 밖을 내다보는 것보다 직접 뛰어드는 편이 훨씬 생생하다. 특히 매 순간 달라지는 모습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출구를 찾을 수 없다.



CLOUDY

날이 제법 흐리지만 지금 괜찮다면 출발이다. 찌푸린 하늘에도 제주는 푸르다. 밭담을 양쪽에 끼고 걸으며 땅 속에 있는 것이 당근이냐 콜라비냐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어떤 길이 이어질까. 밭을 지나 작은 동산을 넘고 마을을 건너면 해안에 닿을 게 틀림없다. 제주의 길 끝에는 늘 바다가 있었다.

올레21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어지다 잦아들기를 반복한다. 바람도 빗줄기만큼이나 마음대로 지나간다. 짙은 구름과 검은 돌이 어우러져 온통 잿빛이다. 그런데 출렁이는 파도와 버티고 선 바위 사이에 대륙의 끝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나타났다. 사후세계로 통하는 길이 이런 데 있지 않을까,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이어질 듯한 기묘한 초록. 막상 가까이 가니 해조류다. 바닷물이 살짝 빠진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미끄러운 돌바닥을 어정거리는 사이에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비를 맞으며 걷는 건 오랜만이다. 세차게 퍼붓는 빗속을 몇 날 며칠 걸었던 적이 있다. 묘한 쾌감이 들었던 날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해방감 같은 게 있었다. 오늘은 쫄딱 젖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모든 날씨를 맞닥뜨리는 올레 표지는 오름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 아래 오늘의 길이 있다. 지나온 길은 가지 않은 길로 이어진다.

지미봉



SUNNY

비 구름이 지난 후의 하늘은 더 파랗다. 덩달아 바다는 여러 겹의 색을 낸다. 투명한 옥색부터 검푸른색까지, 그러데이션을 보이는 바다는 여행자의 마음을 흔들곤 했다. 대신 오늘은 바람의 날이다. 온몸을 밀어내는 강풍에 구름도 바다도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꼿꼿하게 서 있는 갈매기 말고는 모두 휘청이는 것 같다.



이런 날은 구름을 구경하는 맛이 있다. 순식간에 여러 모양을 띄며 흐른다. 구름이 태양과 만나면 세상 모든 색이 출렁이기도 한다. 숨었던 해가 나오면 갑자기 기온이 오르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반전. 그래서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시간의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하루를 연속 촬영하는 듯한 기분이다.



숲은 또 정반대다. 숲에 들어서면 한순간에 고요해진다. 볕이 잘 드는 오늘은 고슬고슬하게 마른 흙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끔 바깥쪽에서 바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여기까지는 닿지 않는다. 모처럼 무릎 아래를 지나 발끝까지 낮은 자리의 삶을 들여다봤다. 붉은 열매가 도드라지는 겨울 숲. 숲길을 걸으면 계절의 흐름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가로수가 머리채를 잡힌 듯 흔들리는 아침을 지나 해가 반짝이는 한낮, 그리고 다시 보슬비가 내리는 밤. 내일은 어떻게 될까. 가까운 미래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 오히려 조바심을 덜어주었다. 불쑥불쑥 솟아나서 나를 날카롭게 만들던 몹쓸 그것. 내일의 날씨가 어쨌든 내 앞에는 단 하루의 제주가 놓일 뿐이다.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오늘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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