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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Nov 29. 2018

아름다운 시절

베트남 후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때는 당장의 행복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까 조바심이 난다. 차라리 영원한 게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가 좋았다. 평생 변치 않을 것 같아 보여도 결국 모두 흘러가고, 어떤 식으로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끝나면 그대로 끝나는 것. 그래도 가끔은 저물어버린 무엇이 다른 이의 화양연화(花樣年華)에 닿을 때가 있다.



Hue

베트남 중부 휴양지인 다낭(Da Nang)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후에(Hue)에 도착한다. 후에는 1800년대 초부터 약 150년간 베트남 지역을 지배한 응우옌 왕조의 수도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화려한 시절을 보낸 만큼 역사적인 건축물은 주요 볼거리가 되었다. 다만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경계에 가까웠던 탓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큰 피해를 입었다. 다낭 인근 관광지로 주목받는 지역이지만 전쟁의 상처가 없는 호이안(Hoi An)과는 정반대의 과거를 가진 셈이다. 물론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사실 옛 수도에 대한 기대는 어디든지 비슷한 편이다. 중심지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가꿔놓은 고궁이나 고성 등의 문화재는 우아하면서도 쓸쓸한 인상을 주겠지. 박제해놓은 과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낯선 양식의 건축물이 주는 자극은 생각보다 크다. 얽힌 사연에 감정이입이 되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후에 황성(Hoàng thành Huế) 입구에는 대부분의 성채가 그렇듯 좌우로 담이 길게 뻗어있었다. 맑디 맑은 날 가장 뜨거운 시간을 택한 탓에 돌담은 물론이고 돌바닥까지 지글지글 끓어오른다. 동남아발 햇볕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팔뚝은 이미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카페로 돌진하게 만드는 날씨다. 모두가 너나없이 헥헥대며 얼음을 찾는 오늘.



자금성의 구조를 본떠 만든 황성은 대부분이 전쟁으로 파손되었다. 곳곳에서 시커멓게 그을리거나 허물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성기에는 얼마나 화려했을까.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일그러진 모습이 쓸쓸해 보이긴 하지만 그 대신 강한 울림이 있다. 상처를 직접 대하면 오래도록 잊을 수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전쟁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된다.



과거는 힘이 없다지만 모든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망해버린 왕조의 흔적이 누군가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종종 복원되었거나 비교적 외형이 온전한 건물 앞으로 사람들이 모이는데, 모두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다. 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손을 휘저으면 멋지게 차려입은 두 사람이 그를 따른다. 커플은 바람 한 점 통할 것 같지 않은 소재로 만든 전통의상을 입은 채 햇빛을 정면으로 맞아가며 미소를 짓는다. 화장이 녹아내릴까 걱정스러운 더위에도 불구하고. 역시 웨딩촬영이란 온갖 장애물을 넘어설 만한 일인가 보다.



어떤 이는 지금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기 위해 오래전에 잊힌 유산을 찾는다. 그렇게 과거의 화양연화(花樣年華)가 현재의 화양연화(花樣年華)에 닿았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위로가 된다. 좋은 날이 지나가버린 것 같아도 또 다른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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