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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Dec 21. 2018

따뜻한 하루

일본 삿포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잘 짜인 스토리보다는 몇 개의 장면으로 조각 나있다. 아빠에 대한 기억도 그렇다. 휴일이면 야구 중계방송을 틀어놓고 모로 누워 졸던 모습. 채널을 바꾸려 슬금슬금 다가가면 안 잔다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가끔은 함께 집을 나섰다. 커다랗고 울창한 은행나무가 줄지어 있던 곳. 노란 은행잎이 잔뜩 깔린 거리를 걸었다. 작은 식당에서 함께 먹은 백반 같은 것도 떠오른다. 앨범에는 이보다 많은 순간이 담겨있지만 막상 마음에 남은 건 사진 한 장 없는 이런 날들이다. 잊지 못할 어떤 감정이 함께 기록된 게 아닐까.



모에레누마 공원

일본 삿포로시 북동쪽에 있는 모에레누마(Moerenuma) 공원은 넓은 부지에 산과 분수, 놀이시설이 복합적으로 배치되어 계절마다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보통 여름에는 물을 튀기며 뛰어놀고 겨울에는 천연 눈썰매장에서 뒹군다. 쓰레기 처리장이었다는 과거는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공원 다운 공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굵은 눈발이 날리는 겨울이다. 도로변에 눈을 밀어 쌓다 보니 또 하나의 담이 될 정도다. 소복하다 못해 수북하다. 버스정류장 표지판 옆으로 좁게 팬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선행자의 발자국을 따라 밟지 않으면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온 발이 젖어버릴 게 분명하다. 그래도 세상 포근해 보인다. 그래, 이런 장면을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



해가 기울어 조바심이 나지만 지나치기 아쉬운 풍경이 이어졌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겨울나무는 위아래로 흰색을 깔고 앉았다. 공원을 감싸는 호수가 있는 자리도 눈에 덮인 지 오래다. 물빛은 찾아볼 수 없다.



땅 위에 불룩 솟은 것은 모두 눈썰매장이 되었다. 걷는 것보다 썰매를 타는 게 편할 정도로 발이 푹푹 빠진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것처럼 두껍게 쌓인 눈 덕분에 다들 안심하고 내달린다. 공원 입구에서 썰매를 빌려왔어야 했다. 아이들 표정만 봐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 것 같다. 추위고 뭐고 저무는 해가 원망스럽다는 듯 1분 1초가 아쉬운 얼굴이다.



어른들은 아이의 온몸에 묻은 눈을 툴툴 털어냈다. 삐죽 솟아오른 털모자를 눌러 당기고 옷매무새를 다듬어 준 뒤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다시, 몇 번이고 오른다. 아이를 끌어안고 함께 타는 아빠도 있다. 때때로 아빠의 표정이 아이보다 더 좋아 보였다.



아이는 겨울이 올 때마다 노래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내복만 입은 채로 엄마 아빠에게 매달리는 날도 있었겠지. 오늘처럼 어스름이 깔릴 때도 한 번만 더 타겠다고 졸랐을 게 분명하다. 딱히 썰매가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의 내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에 그랬던 것처럼.



손발이 얼얼하다.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옛날을 생각했다. 소복이 쌓인 눈만큼이나 맑고 따뜻한 날들이 있었다. 소매나 바짓단 틈으로 들어간 눈 때문에 온몸을 떨면서도 마냥 해맑게 웃었다. 핀잔을 주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던 엄마 아빠.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모양의 날들. 종일 눈밭을 구른 어느 꼬마의 마음에도 오늘이 사진처럼 찍힐지 모른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훈훈한 감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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