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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Nov 01. 2019

Burning Heart

태국 아유타야 선셋보트

꼬박꼬박 연재를 챙기던 만화가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은은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작품이었는데, 새 단행본이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가 툭 던진 장면 하나를 넘기지 못했다. 노을을 보면 불을 지르고 죽어버리고 싶다는 대사를 붙들고 한참을 곱씹었다. 이후로 노을을 볼 때마다 그 날이 되살아나곤 한다. 좀비처럼 돌아오는 열아홉의 노을.



아유타야 선셋보트

방콕 여행자들이 한 번쯤 검색해보는 아유타야. 방콕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가면 이국적인 문화재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교통편이 결합된 여행상품이 많다. 이것만으로 아쉬운 사람들은 ‘선셋보트’를 추가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해질 무렵 강변에서 보트를 타며 경치를 즐기는 것. 아유타야 역사공원 서쪽 파삭강에서 출발하여 남쪽 짜오프라야 강을 지나 동쪽 사원 인근에서 끝나는데, 운이 좋다면 아주 강렬한 노을을 볼 수 있다.



한낮의 강변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상가옥이 드문드문 서 있었고, 강물은 흙색과 녹색을 섞어 뭉갠듯한 색을 띠며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기대할 여지가 없는 평범한 풍경. 사실 일상에서는 적당한 시간에 하늘을 올려다볼 만한 여유가 별로 없다. 고개를 꺾기 보단 앞으로 나아가느라 마음이 바쁘다. 물론 이방인인 내게는 더없이 특별할 오늘의 선셋.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사물의 디테일이 묻히는 대신 윤곽이 또렷하게 살아난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유적이 거대한 기둥처럼 솟아 주변을 압도했다. 무기력해 보였던 대낮과 달리 왕의 귀환이란 단어가 떠오를 만큼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태양을 중심으로 세상이 반으로 갈라져 대비되는 시간. 보통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하늘은 다채롭게 변하는 반면 아래쪽은 누가 어둠을 덧칠하나 싶게 새카매진다. 이렇게 강 위로 붉게 번지는 노을이라니, 다른 차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현지인이 운전하는 낡은 보트 위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탁한 물빛은 어디로 간 걸까. 손을 담그면 그를 따라 붉게 물들 것 같다.  



팁을 외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릴 때쯤이면 탈출했던 정신도 돌아온다. 판타지 영화처럼 강렬했던 세계는 자취를 감춘 태양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온 세상을 불태워버릴 것처럼 뜨거운 인상만 남긴 채로.


죽어버리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짜릿했다. 낯설다는 이유로 어린 나를 잊은 건 아니다. 찬란한 노을 앞에서 울고 싶은 마음을 삼킨 적도 많다. 다만 이제는 열아홉이 나를 울릴 때도 있지만 내가 열아홉의 나를 위로할 때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저 모두 나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빠짐없이 남김없이 모두 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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